호형호제를 허하노라?
ROTC( R eserve O fficers' T raining C orps 또는 Reserve Officer Training Corps)는 미국의 장교 양성과정의 하나로 직역하면 '예비역장교훈련단'
예약된 모임장소에 도착해 보면 식당 예약 명단이나 객실 문에 '아로티시'나 '아루티씨'등으로 쓰여있기도 한다. 아직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거 같은 전문용어.
미국의 제도를 모델로 삼아 1959년 한국해양대학교에 도입했다. 2년 뒤인 1961년, 전국 16개 종합대학에 육군학군단이 창설됐다. 해양대학교가 최초라는 건 이제야 알았다. 이어 공군 학군단(1971년)과, 해병대 학군단(1974년)이 순차적으로 출범했다. 2011년 숙명여대를 시작으로 여자대학에도 학군단이 꾸려졌으며, 2013년에 첫 여성 학군장교가 배출됐다. 창설 초기부터 대학의 우수한 인재들이 대거 몰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들은 군(軍) 뿐 아니라 학계, 정계, 재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이름을 떨쳤다. 미국에서는 국무장관을 지낸 콜린 파월과 존 케리, 그리고 국방장관을 역임한 도널드 럼스펠드가 ROTC 출신이고, 가까이에는 1998년 김진호 대장(2기)이 ROTC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군 서열 1위인 합참의장에, 2020년에는 남영신 장군(23기)이 육군 참모총장에 각각 올랐다.
ROTC 후보생 지원 경쟁률은 2017년 3.9대 1을 기록한 이후 계속 내리막길을 걸어 최근 역대 최저인 1.6대 1에 그쳤다. 육군 학군단을 운영하는 전국 대학 108곳 중 절반인 54곳이 후보생 정원을 채우지 못한 채 미달돼 창군 이래 처음으로 추가 모집을 실시했다. 임관하는 학군 사관의 숫자는 지속적으로 감소해 2000년을 기점으로 4,000명 아래로 떨어진 뒤 매년 줄고 있다.
이 격랑의 한복판에 난 서울의 K대 학군단 선임교관(훈육관)이었다. 100명에 가까웠던 입단 동기들 중 10여 명이 중도 포기하고 8,90명이 임관했던 대학 학군단이 10여 년 후 정원은 50명으로 반토막이 나 있었고, 이마저 채우기가 어려웠다. 분단국가에 태어난 청년으로 의무를 다하겠다는 각오는 계급으로 갈리지 않는다. 분명 병사로 입대했을 경우보다 무언가 얻는 것이 많다는 유인책이 작용한다. 제한된 경험을 근간으로 보면, 우선 IMF라는 충격파로 휘청였던 그 시절 전까지는 임관 전 우선 취업이 가능했다. 사전 취업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역 후 일자리를 찾는데 유리했다. 조직에 필요한 리더십의 측면에서 장교출신은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았고, 실제로 2년여의 야전 소대장 생활은 엄청난 리더십의 도전과 응전의 시기였다. 하지만 R.O.T.C. 인기는 현저하게 식어가고 있었고, 이른바 명문대학을 중심으로 수도권 내 대학에서는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었다.
모집시기가 되면 비상이었다. 상급부대인 학군교에서는 모집홍보활동을 잘하느니 못하느니 시끄러웠고, 매일 게시판에 지원율 현황을 업데이트하면서 경쟁을 부추겼다. 과도한 부추김과 협박성 질책은 결국 역효과를 낳고 마는데, S대 학군단 지원율이 현격하게 높았던 사건. 당시 새로 부임한 단장의 능력과 교관들의 탁월함으로 평가되기도 했지만, 꼼수였고 결국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전년도 저조한 지원률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3학년 훈육관이 묘수를 냈는데, 후보생들에게 과 후배들을 1:1로 밀착해서 지원서만 작성해서 제출하게 한 거다. 물론 조조체육 면제라는 달콤한 조건을 걸었다. 문제는 필기시험날 터졌다. 단순히 원서접수만 하면 끝나는 줄 알고 순순히 선배의 부탁을 들어준 지원자들은 지루한 시험을 참지 못하고 대다수가 시험 중간에 퇴실했고, 지원률에 비해 응시율은 현저히 떨어졌고, 최종지원율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 생각으로 S대 학군단은 많은 걸 잃었다. 그렇잖아도 대학 교정에서 바보티시 라는둥 적잖이 공격을 받아온 학군단의 위상이 더 추락했음은 물론이고, 이보다 더 큰 손실은 장교가 될 후보생들의 도덕성에 큰 상처를 남겼음에 틀림없다.
ROTC의 인기가 시들해진 이유는 학령인구 감소 때문만 아니다. 복무 기간, 처우, 전역 후 진로 문제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학군사관은 육군 단기 복무 장교의 70% 정도 차지하여 군 전체로 볼 때 약 30%인데, 장성의 비율은 10%도 안 돼 매우 낮다는 사실이 지원율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되었듯 대부분이 단기복무 자원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다.
병 복무기간 단축과 봉급 인상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단 그 당시에 파악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당사자인 후보생을 통해 접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군사학 과목 이수 외에 방학마다 있는 입영훈련이 문제였다. 우리 때와 다르게 많은 수의 학생들이 방학기간을 활용하여 어학연수 등 해외로 나가는 활동을 하고 싶어 하고, 하고 있었는데 입영훈련과 겹친다. 그리고 과거 장교라는 역할은 리더십 함양에 절대적 우위를 지닌 체험기회였는데(개인적으론 이 믿음엔 변함이 없다) 당시 주류를 이루던 경영학 전공자들은 과 커리큘럼을 통해 사회에 진출해 조직에서 성장에 필요한 리더십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으로 우수한 후보생들을 미국 대학과 연계하여 방학 동안 미국 대학생들과 함께 훈련받고 성과를 인정해 주는 제도를 제안했지만 좋은 발표로 끝이 났다. 상급부대이자 학군제도에 대한 최종 책임기관이라 할 학생중앙군사학교에서 대학과 직접적인 협상과 제안 등의 활동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개별 대학의 학군단에만 책임과 결과를 떠넘기는 느슨한 시스템이 원흉이었다.
임관 후 직업군인으로 돌아선 경우에도 커리어에 대한 정보력에서 사관학교 출신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뒤처질 수밖에 없고(정책 기획자들은 주로 사관학교 선배들이다) 지휘관들(대부분 최상의 지휘관은 육사출신이고 간혹 있는 일반출신 중간 지휘관들은 결국 최종 지휘권의 눈치를 보거나, 눈치를 안 보더라도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티 나게 출신을 구분하여 차별했다. 대위 계급장을 달고 특전사 팀장으로 3년을 꽉 채운 나와 대조적으로 함께 부임한 육사출신 동기들은 중간에 국내, 해외로 유학을 갔고, 난 국내유학의 기회는 지원시기를 몰라서, 해외유학은 당시 여단장(준장)이 3번씩이나 결재를 반려하여 응시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인사장교의 전언에 따르면 ‘인사장교 넌 부대 인사장교야, 개인 인사장교야? 개인사정 다 봐주면 부대엔 누가 남아서 일하나?’라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대장까지 진급한 그분의 혜안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마는 누가 봐도 개인적, 출신적 차별이었다. (개인적 차별의 원인이 된 에피소드는 다음 기회에)
전역 후 동문모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정원은 30명대로 줄어 단장을 대령에서 중령으로 조정한다느니 지역별로 통폐합한다느니 흉흉한 가운데 여후보생의 선발을 두고 마치 축제인양 난리법석이었다. 물론 장교가 되기 위해 도전한 후배 여대생이야 반갑고 대견하지만 동문이라면서 본질적 문제에 천착하지 않고 그저 과거에 자신들이 누렸던 그리고 지금도 누리고 있는 집단의식에 갇힌 모습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전방에 소대장이 없다고 난리다. 정원도 못 채우는 마당이니 역량의 평균하향화는 쉽게 예견된다. 학군 출신 장군 진급은 내가 보기엔 그냥 구색 맞추기에 더하지 않다. 개혁이 필요하다. 학군의 위상 제고 차원이 아닌 군의 발전을 위해 사관학교부터 개혁해야 한다. 그 개혁과 더불어 타출신(일반출신) 장교제도의 개선도 가능할 거다.
전역 후 대대장이 된 육사출신 선배의 부대를 찾아간 적이 있다. 두 번씩이나 내게 자리를 물려준 선임 장교의 인연. 내 전역을 아쉬워하며 ‘대령까지만 잘 버티면 네가(학군장교) 우리(육사장교) 보다 진출에 유리할 텐데’라고 했다. ‘역차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그런 뉘앙스였다. 비율 차원의 논리일지 모르겠지만 참 아이러니한 동상이몽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부르라고 했다는데 적서차별은 그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