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 그리고 용감한 청년
문무대에서 / 1년 차 5546번 정썰
이곳의 하루는 정신없이 느리다.
이곳에선 불합리가 합리가 되고
비능률이 능률이 된다.
예민한 정신은 무디게 바래지고
종교는 음료수 하나에 쉽게 팔린다.
이곳에서는
조용한 사상가보다는 과장된 활동가가 낮고
다정한 말 벗 보다
손에 든 빵 하나가 더 즐겁다.
이곳의 하루는 지루하게 빠르다.
1년 차(대학 3학년) 첫 입영훈련 후 써서 학군단 자체 발간 문집에 투고했던 글. 문무대는 당시 성남에 위치한 학생군사학교의 별칭이다. 이곳에서 3, 4학년 4번의 방학 동안 입영훈련을 받았다. 상명하복을 몸에 익히는 과정이고 제한된 생활에 적응하는 곳이라 많은 것들이 불합리하고 능률의 기준이 달랐다.
두 가지 에피소드가 떠오르는데 하나는 치기 어린 반항이었고, 또 하나는 용기 있고 정당한 요구였다.
하나.
후보생의 두발과 복제에 관련한 얘기다. 장교후보생은 장교형 머리를 해야 했고, 제복과 같은 색의 베레모(단모)를 써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희한하게도 대대로 단모를 쓰고 다니지 않았다. 당연한 거라 생각했는데 당시 신임 학군단장은 육사출신 4학년 훈육관을 통해 단모 착용을 지시했다. 한 해 동안 우리 무리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있던 훈육관은 일방적 지시를 하지 않으셨다. 사실 ‘단장님 지시사항이고 규정이다. 내일부터 전원 단모를 착용한다.’라고 하면 끝날일이다. 물론 원칙을 말하는 거다. 분명 우리 동기들은 그냥 따르지는 않았을 거다. 그에 앞서 훈육관님은 나름 합리적인 제안을 하셨다. 우리가 평소 캠퍼스에서 단모를 쓸 수 없는 이유를 적어 내게 하셨다.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전통입니다’부터 시작해서 자잘하고 개인적인 이유를 압도적으로 덮은 나름 합리적인 다수의 의견이 있었다.
장교후보생은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언행에 품위가 있어야 하고, 복장과 용모도 단정해야 하며, 수업과 과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임해야 합니다. 단정한 두발을 하고도 단모를 쓰고 다니다 보면 수업 등 실내 활동 시 눌린 머리모양이 되어 타 학우들의 놀림거리가 되는 등 단정한 두발, 품위 유지에 저해됩니다.
뭐 이런 느낌의 이유였다. 놀랍게도 이 내용은 훈육관님은 합리적 이유로 채택하셨고, 단장께 건의하여 우리는 임관 전까지 이 철없는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희한한 일이다. ‘그렇다면 머리가 눌리지 않게 짧게 자르고 단모를 써라’ 했으면 우린 어떻게 반응했을까. 어떤 게 이치에 맞는 걸까.
둘.
하계입영 때였다. 저녁 점호를 준비하고 있는데 화장실로 전원 집합 명령이 떨어졌다. 니이로 따지면 두세 살 정도 많은 중위 훈육관이 발령권자다. 좌식변기가 있던 화장실 칸칸으로 우리들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호스로 물을 뿌렸다. 화장실 청소 불량이라는 죄목?에 따른 처벌이었다. 엉겁결에 화장실에 몰려 갇힐 때까지는 청소불량에 대한 죄책감이 컸다면 물을 맞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다음날 우리는 명예위원장(4학년 대표 후보생)을 통해 전원이 서명한 탄원서를 학군단장께 제출했다.
장교답지 못한 훈육관에게 장교 양성 훈련을 받을 수 없으니 교체해 달라는. 단장님은 충분히 이해하고 잘못된 훈육임을 인정하셨으나 이런 행위는 집단항명의 범주에 들 수 있으니 옳지 못하다며 본인이 훈육관에게 구두 경고를 약속하셨다.
운이 좋아서 군이라는 조직 안에서도 합리적인 건의와 조치가 가능하다고 느꼈다. 수많은 불합리를 느꼈지만 이 두 사례는 일말의 희망을 갖기에 충분했고, 초임장교가 되어 병사들을 대할 우리의 자세에 큰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정신없이 느리고, 지루하게 빠른 곳. 합리와 능률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는 곳. 어쩌면 나와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는 곳.
그곳이 앞으로 내가 직업인으로 살아가야 할 터전이라는 걸 그땐 잘 몰랐다. 콜린파월을 롤모델로 삼아 그의 자서전을 읽으며, 최종목표 국방부장관이라는 야무진 꿈을 꾸며 성큼성큼 발을 내딛고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한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