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생활을 피해 도피처를 찾다
소대원들과 한 팀이 되는 건 만만치 않았다. 두 달 동안 진심?을 보여준 끝에 병장들이 소대의 사소한 일들을 의논하러 오기 시작했고, 이등병들도 말을 건네왔다. 정신교육시간이었다. 교육하는 사람이나 교육받는 사람이나 참 재미없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교육. 소대장에게 ’ 마음의 편지‘를 써달라 했다. 아무 내용이나 하고 싶은 말을 쓰되 가급적 필체를 알 수 없게 하라는 가이드라인을 줬다.
학교에서 형으로 만났으면 더 좋았을 거 같다는 내용부터 부임 초기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 그중 누가 봐도 소대 막내가 쓴 게 분명한 글은 충격적이었다. 집이 전라도 작은 섬이어서 휴가를 모으고 모아야 한 번 다녀오던 막둥이. 전입과 동시에 이어진 고참들의 밀착 주적교육을 통해 ‘관부가 우리의 적이니 관부들을 조심하고 이용당하지 말라 ‘ 세뇌를 당한 착한 막둥이. ’간부‘인지 ’관부‘인지도 구분이 안 되는 상황에서 그저 고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장교과 부사관이 자신의 적이라고 배운 불쌍한 막둥이는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기존의 관부(간부)들은 고참들의 가르침처럼 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소대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적은 아닌 거 같았단다. 미안했다. 어쩌다 전우가 적이 되는 군대가 되었을까. 장교의 잘못이다. 6.25 전쟁에서 뒤에서 날아온 총알에 맞아 죽은 소대장들이 적의 총에 사망한 숫자보다 많았다는 괴담은 어쩌면 진실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 이후 난 말과 행동에 더 조심하고 솔선하려 애썼던 거 같다. 막둥이가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게, 막둥이가 선임이 되었을 때 전입신병에게 다시는 자기가 받은 잘못된 주적 교육을 하지 않게. 소대원들에게 난 적이 아니었고, 나에게 소대원들은 적이 아니었다. 나에게 적은 따로 있었다.
하나. 통신중대장. 일단 뚱뚱하고 거들먹거리는 몸짓이 맘에 안 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소대장실로 와서 담배나 지폐를 걸고 내기 장기를 두곤 했다. 동기로 함께 부임한 3 소대장은 장기를 잘 두는 친구였다. 내 기억에 대부분 내 동기가 이겼지만 통신중대장은 한 번도 패배를 인정한 적이 없다. 물론 자신이 이기면 담배나 지폐를 거둬서 유유지 방을 나섰다. 장기를 두는 중 커피와 담배도 다 우리 소대장들이 대야 했다. 맨입으로 놀다가 운이 좋으면 전리품을 챙겨가는 빌런 1. 테니스를 잘 쳐서 연대장에게 예쁨 받는다는 미확인 소문도 흉흉해서 공공의 적이었다 공공의 적이었기에 난 그가 늘 탐탁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겨울. 난 중대 5분 대기(상황발생 시 5분 안에 출동하여 초동조치를 해야 하는 임무로 소대와 함께 1주일씩 돌아가면 대기하는 임무) 소대장이었고, 통신중대장은 그날 연대 당직사령이었다.
저녁 순찰 중 소대장실에 들어와서는 말을 걸었다. ‘퇴근 안 하나?’ ‘5분 대깁니다.‘ 지적거리를 찾은 하이에나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 5분 대기 소대장이 왜 전투야상을 안 입고, 잠바(점퍼)를 입고 있나?‘ 난방시설이 없는 소대장실이 추워서 조금 더 따듯한 점퍼를 입고 있었는데 딱 걸린 거다. ’5분 안에 출동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환복하고 시간 내 출동할 수 있습니다.‘ 당돌한 대답은 평소 공공의 적에 대한 적의가 실린 억양이었다. ’그래? 알았어.‘ 하며 돌아서는 그의 표정에서 ’어쭈 함 해보자는 거지?‘ 또는 ‘그래? 어디 함 당해봐라’ 정도를 읽을 수 있었다. 분명히 불시에 비상을 걸 거다. 새벽까지 소대장실에 있었다. 불안해서. 뱉어놓은 말이 있으니 실수 없이 비상출동을 해야 해서. 새벽 두 세시까지 비상은 발령되지 않았다. 의아했지만 바쁜가 보다 싶어 소대원들이 곤히 잠든 내무실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누웠다. 막 눈을 감았다 싶었는데 불침번이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소대장님’ 꿈인가? 비몽사몽 눈을 떴다. ‘소대장님 5분 대기 비상입니다.’ 꿈이다. 사이렌 소리도 없고 내무실 불도 꺼진 상태다. ‘소대장님만 비상입니다.’ 헐.
주섬주섬 완전무장을 하고 상황을 파악했다. 위병소에 거수자 출현. 소대장만 출동. 비열한 자. 이건 훈련이 아닌 복수다. 허둥지둥 위병소로 달려갔다. 위병소의 새벽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위병조장에게 물었더니 훈련상황은 없단다. 이건 또 무슨. 조금 있으니 위병소 전화가 울렸다. 건네준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빌런의 목소리. ’야 인마. 탄약고에 상황을 줬는데 위병소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지휘통제실로 튀어와!’ 완전군장에 차렷자세로 그놈의 훈계를 30분 넘게 들었다. ‘복장을 지적하면 잘못했습니다 하고 시정할 일이지 뭐? 5분 안에 출동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상관에 대한 자세야?’로 시작된 일방적인 훈계를 쏟아내더니 자판기 커피를 한 잔 건넨다. ‘헬멧 벗고 마셔’. ‘안 마십니다.’ 헬멧도 벗지 않았다. 그렇게 빌런에게 호되게 당하고 말았다. 억울할 거 없다. 여기는 계급이 깡패인 군대니까.
둘. 인사과장. 소령인데 일을 하지 않는다. 내 전임자인 인사장교 선배는 늘 새벽까지 야근이었고, 휴일에도 출근해서 일을 했다 S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통과한 선배는 행정장교로 군역을 필하려 지원했다가 행정착오로 야전부대 소대장으로 온 나이도 많고 덩치도(머리도) 큰 별병이 공룡인 우수한 학사장교였다. 업무능력이 많이 떨어지고 게으른 인사과장은 내가 부임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인사장교 자리에 앉혔다. 연대 인사 관련 업무는 거의, 아니 전부 인사장교 선배가 처리하고 있었다. 빌런 2. 그 선배가 전역할 시기가 다가오자 날 불러 코칭을 했다. 이 부대를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자리에 내가 오게 될 거란다. 탱자탱자 좋은 시절을 보내던 인사과장이 일 잘하는 선배가 떠나면 그 역할을 대신할 후임으로 날 찍어두었다는 거다. 직살나게 고생하지 말고 떠나라. 방법은 인사장교답게 명확했다. 부군단장이 새로 부임할 예정인데 전속부관에 추천할 테니 무조건 가라는 거였다. 업무도 많지 않을 거고 상급부대라 지내기도 나을 거라고, 무엇보다도 쓰레기 같은 인사과장 아래에서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는 거보다 나쁜 경우는 없다는 판단. 그렇게 계획과 마음이 정해졌다. 그런데 청전병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부임 예정이던 부군단장 인사에 변동이 생겨서 백지화되었다는 거. 눈앞이 깜깜했다. 방법이 없을까? 선배는 자기 일처럼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며칠 후 대안을 제시했다. 사단장님도 교체가 될 거 같으니 무조건 거기에 모든 걸 걸어보자는 거였다. 사단 인사참모 주관 면접에 무조건 갔다. 평소와 다르게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열명 정도의 경쟁 후보들도 만만치 않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들려오는 육사동기가 내정되었고, 그날 면접은 요식행위라는 소문. 한마디로 들러리 섰다는 거였다. 아, 군생활 이렇게 꼬이나? 그냥 하루 사단 구경하며 잘 놀다 왔다고 위안하던 그날엔 생각지 못했다. 녹색반지를 빼고 군생활을 하게 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