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17/화/맑음
종이컵에 커피믹스를 녹이고 어제 사온 목월빵집 빵으로 아침을 대한다. 빵은 맛있다. 허브향이 나는 덤덤한 건강식 빵인데 색색의 젤리? 가 간혹 씹히면서 심심하지 않다. 어제 빵집 2층에서 먹었던 복숭아크림빵도 맛있었다. 맛집 맞다. 여행지마다 유명한 대표 빵집이 하나씩 있다. 빵 투어는 아니지만 여행일정에 하나씩 끼워두면 그 재미 또한 크다. 어제 순천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지나친 ‘조훈모과자점’이 못내 아쉽다. 아홉 시 조금 넘어 ‘지리정원’을 떠난다. 여행 마지막 목적지는 노고단(老姑壇).
내비게이션에 성삼재휴게소를 찍고 오른다. 굽이굽이 시속 20Km를 권유받으며 오르는 중간중간 녹지 않은 구간과 고도 표지가 보인다. 900m를 통과한다. 오 개이득. 성삼재 주차장까지 가면 큰 어려움 없이 노고단에 오를 수 있을 거 같다. 너무 티가 났는지 시암재휴게소에서 도로통제 바리케이드를 만났다. 차를 세워두고 예정보다 이른 걷기 시작.
여기부터는 하얀색이 대세다. 어제 화엄사에서 멀리 바라보이던 지리산의 하얀 부분이 여기부터인 거 같다. 1.5km 정도 더 걷게 된다. 집에 두고 온 스틱이 아쉽다. 성삼재휴게소를 가로질러 오르는 길에 세 번 정도의 선택권을 준다. 편안한 길. 모두 거절하고 오른다. 시간도, 거리도 줄이고 싶은 마음. 노고단 대피소를 지나니 온통 눈세상이다. 예쁘다. 눈이 부시다. 차에 두고 온 선글라스가 아쉽다. 노고단 고개에 도착했다. 커다란 돌무더기가 보인다. 여긴가 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작은 돌무더기 하나가 더 보인다. 거기다. 오를수록 시야가 열리고 바람은 거칠다. 시어머니(姑) 매운맛이 이런 건가.
높이 1,507m. 천왕봉(1,915m), 반야봉(1,734m)과 함께 지리산 3대 봉의 하나. 오래전 아들 녀석과 함께 천왕봉에 올랐으니 이제 반야봉 하나 남았네.
노고단이란 도교(道敎)에서 온 말로, 우리말로는 ‘할미단’이며, ‘할미’는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仙桃聖母)를 일컫는 말이고 여기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한다. 내려오는 길에는 갈림길에서 모두 편안한 길을 택했다. 아이젠도 없어서 미끄럽기도 하고 새로운 길로 내려가고 싶기도 했다. 정상에서 체온을 빼앗긴 데다 내리막길이라 활동량이 줄어서인지 춥다. 장갑 낀 손도 시리다. 성삼재휴게소 무인편의점에서 이 천 원짜리 **라테(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네) 한 잔을 나눠 마시며 손과 몸을 좀 녹였다. 시암재에서 성삼재 오르는 동안 제설차가 오르내리더니 그새 성삼재까지 도로가 뚫렸다. 마지막 구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사람이란 게 얼마나 간사한지. 통제가 풀린 도로와 성삼재에 주차된 차들을 보니 그것도 아쉬운 거다. 무사히 귀차. 핸따 없는 오래된 차지만 엉따와 히터만으로 남부럽지 않다.
편안한 길에 대한 생각.
하나, 편안한 길을 택하면 좀 더 오래, 좀 더 길게 걷게 된다. 편하면 얼마나 편할까. 혹은 걸으면 얼마나 더 걸을까, 더디면 얼마나 더딜까.
둘, 살아오면서 편안한 길이 있었던가? 선택의 여지는 있었던가? 앞으로의 여정에 다시 선택의 기회가 오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평소 뒷산을 달리고, 걸어 오르내리며 드는 생각. 달리는 사람에겐 걷는 것도 휴식이고, 걷는 사람에겐 멈추는 것이 휴식이다. 경사로를 오르는 사람에겐 평지가 편안함이고, 평지를 걷는 사람에게는 내리막길이 편안함이다. 얼마 전 일독 한 유영만 교수의 ‘끈기보다 끊기’에서는 잘 내려가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다. 어쩌면 벌써 내리막길에 들어선지도 모르겠다. 내 깜냥에 맞는 목적지, 경로, 속도로 걷자. ‘강나루 건너서 밑발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처럼 단 방향은 잃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