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백마부대는 명예와 전통의 부대였다. 월남전 참전 부대. 노태건이 사단장을, 전두광이가 예하 연대장을 역임한. 북과 대치한 조국의 심장 서울의 북쪽을 방어하는, 수도권에 위치한 부대. 육사 참모장을 마치고 진급하신 사단장님은 원래 강원도의 모 사단장으로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권력에 빌붙지 않고, 인사 관련 줄을 대지 않는 강직함과 고지식함의 결과였을 거라 추측한다. 취임 며칠 전 육사 교장으로 함께 근무한 장군께서 손을 쓰셨다고 들었다. 어쩌면 틀어진 인사를 바로 잡은 결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너 제정신이야?
너 미쳤어? 너 목숨이 몇 개야? 별 하나가 대단한 건 줄 알아? 정확한 문구는 기억에 흐릿하지만 뭐 이런 유의 협박이었다고 하셨다. 장군이 되고 처음 보직된 곳은 당시 육군 P.X. 등을 총괄하던 육군복지지원단장 자리였다. 취임 후 첫 명절을 맞을 즈음 정치권으로부터 목록을 받았는데 주로 군납 양주를 비롯한 일반인들이 선호하는 선물용품이었다. 고민할 필요가 없던 상황에 그분은 장고(長考)에 들었다. 옳지 못한 관행이라고 생각하신 거다. 장고 끝에 택한 방법은 목록대로 선물을 준비해서 청구서를 첨부해 보낸 것. 선물이, 아니 상품이 도착하자마자 단장실 전화통에 불이 났다고. 주로 처음의 협박성 경고였고, 국회의원 보좌관급이 그랬을 거다. 그 권력의 가벼움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분은 뜻을 굽히지 않으셨고, 결국 구태를 청산했다. 시대적 분위기가 변화와 청렴의 의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이권이 우려되어 단임제로 운영된 그 자리에 연임의 역사를 기록하셨다고 한다. 취한 세상에 홀로 제정신이었던 내 롤 모델.
사과할 줄 아는 연대장
겸손은 힘들다는 말이 있다. 노래가 있을 정도니 보편적인 상식이라 해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개인적으로 생각에 사과는 겸손보다 힘들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표현한다는 건 여러모로 쉽지 않다.
연대장 시절 부대에 강당이 없어서 신축 관련 참모회의를 소집하셨다. 취지를 설명하고 관련 참모별로 예산 등 제반 사항에 문제가 없다 하여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고.
쓸만한 강당이 연대 연병장 한편에 떡하니 들어선 얼마 후 연례행사와 같은 소원수리 편지를 일일이 읽으시던 사단장님은 큰 충격을 받으셨다. (아마도 그 당시 사단장님께서는 병사들의 쪽지를 참모를 거치지 않고 직접 읽고 답하시는 시스템을 구축한 거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문제의 쪽지는 참모선에서 걸러져 휴지조각으로 사라졌을 거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연대장님 전 입대 전까지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짓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왜 제가 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제 의사와 무관하게, 제 가치관에 반하는 도둑질을 해야 합니까? 급하게 참모들을 소집해서 확인해 보니 명령에 대한 무조건 복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비틀어진 군인정신의 발현이 문제였다. 예산이 부족했지만 연대장의 명령에 다른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 관할 지역 내 공사장에서 건축자재를 훔쳐다 공사를 진행했던 건데. 고등학교 친구 중에 육사 입교 후 입교 전 새벽 집합 후 담 넘어 근처에 있던 누나네 집으로 도망쳐 퇴교당한 후 삼수 후 입대한 친구의 증언? 에 따르면 새벽에 행보관이 병사들을 깨워 생활복(주황색 트레이닝복)을 뒤집어 입고(어둠 속에서 눈에 띄지 않도록 하는 치밀함) 육공 트럭에 실린 후 어딘지 모를 장소에서 행보관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공사자재를 실어 왔다는 것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부대에서 공통적으로 자행되던 짓이었던 거 같다. 도둑질이라는 행위보다 더 무서운 건 병사들의 선악에 대한 감각을 무뎌지게 한다는 것인데, 친구 왈 그런 날엔 작전?에 참여한 병사들은 그날 하루종일 자고 공 차고 먹는 일과를 보상으로 받으니 때로는 그 범죄의 시간을 기다릴 때도 있었다고 했다.
아무튼 거짓으로 보고한 참모를 탓하지 않으시고 모두 자신의 잘못으로 떠안아 연병장에 전 병력을 모아놓고 마이크를 잡은 사단장님은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고 하셨다. 그 당시대한민국 육군에 병사들에게 사과하는 지휘관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아니 지금은 몇이나 될까?
사단장님은 새벽에 오인 신고된 간첩 침투 상황에서도 자신을 깨울 수 있게 하셨고, 밤을 새운 작전 끝에 해프닝으로 밝혀진 후에도 오인신고한 민간인과 해당 작전부대에 즉각적인 표창을 하셨고, 공관에 자꾸 올라오는 본부대장도 출입을 제한토록 하셨고, (물론 본부대장 아내가 대신 몰래 드나든 건 나중에 공관 요리병의 싸대기 사건으로 알게 되었다.) 겨울철엔 새벽 서너 시경에 커피를 끓여 사탕과 함께 공관 경계병들을 격려케 하셨다. 대부분 졸고 있다 전속부관을 조우한 병사들은 최악의 상황을 예상했을지 모르지만 사단장님의 의도가 분명했기에 나도 위로와 감사를 전하는 것 외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아무튼 1년 남짓한 전속부관 생활 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군생활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사단장님처럼 멋진 장군이 되고 싶었고, 그전에 그 분과 같은 장군들이 많은 대한민국 육군은 내 인생을 걸만한 곳이라는 희망이 비쳤다. 패착이었다. 사단장님 같은 장군은 드물었다. 적어도 그 후 내가 겪은 장군들 중에는 없었다. 심각한 패착이었다. 그 시절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난 5년 차에 전역을 택했을까? 아니면 오히려 쉽게 적응하여 아직도 군생활을 하고 있을까. 그분의 존재는 행운이었다. 군에도 내게도 그 시절 전우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