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쉽. 시.

세상에 쉽게 쓰여진 시는 없다

by 정썰

생각이 고여 넘치면

팔을 타고 내려

손으로

펜으로 스미다

긁힌 자국

안에 고이면

어쩌다 어쩌다 시가 되기도 했다.


가슴에 느낌이 고이지 않으면

그만인데

자꾸 머릿속을 긁어내기도 했는데

설익은 밥처럼, 덜 익은 과일처럼

잘 씹히지 않았다.

떫었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

지루한 눈치게임은 진도가 나가지 않고

환자도 아닌 난

애먼 경쟁의 누명이 억울하다

못해

갑자기 스친 생각을 잡아

스마트폰 자판을 두드린다.

펜이 없어도

종이를 긁지 않아도

쉽게 쓰여지는 시

는 페이크

뭉툭한 엄지는 자꾸 생각을 겹치게 하고

뒷걸음질 치다, 뒷걸음질 치다 지쳐

비로소 엄지보다 뭉툭해진 정신


문득,

뜬금없이

시를 쓰겠다던

나는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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