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스러웠던 또 하나의 장면이 넘겨진다
다른 장을 맞이하는 것은
머물지 못하고 떠난 곳의 그림자를
밟고 일어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새로 써내려 질 것들은
발꿈치 아래서 떨고 있고
청중의 눈길이 부재하는 빈 화면은
그대로 재생된다
가만히 그 적막한 혼동을
회색 시멘트 벽을 쳐다보듯 바라본다
마침내 떨림이 멎고
그림자가 옅어지면
석화된 무언가의 위에
시간에 얼기설기 설킨 숨이 새겨지기 시작한다
새로운 페이지가 사각사각 낡아가는 동안
새로운 그림자가 차오르기시작한다
한 장이 다 소모되고
다음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발끝자락에 휘휘 감겨있는 그림자를
어기적 거리며 떼내려 애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또 다른 숨의 부유물일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자가 발끝에 걸리적거릴 것이다
다음 장, 그리고 또 다음장...
켜켜이 쌓인 그림자들은 결국
나의 형상을 띄고 있을 테다
다만, 무엇이 먼저라 말하긴 껄끄러울 수 있을터.
잘 모르겠다- 손 젖는 나는
무기력증을 재빨리 안아버린다
언제나 그래왔듯
다음 장은 또 넘어가고, 넘어가고, 넘어갈 것이다
그림자는 또 쌓이고, 쌓이고, 쌓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얼마간의 피로감에 시달리며
모두를 받아낼 것이다
단지 어쩔 수 없단 이유 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