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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Oct 21. 2021

감사한 날들

 ‘네, 네, 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함을 연발하던 내 또래의 여인은 휴대전화에 대고 절을 하는 것으로 대화를 마쳤다. 기실 그녀는 휴대전화와 함께 고꾸라져 길바닥으로 쓰러질 듯하였다. 전화 속 여인의 과하지 않게 명랑한 목소리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신호등이 바뀌어 총총 길을 건너던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슬쩍 쳐다보았다. 두 손으로 꽉 잡은 전화기를 가슴에 품고 있다가 이제야 바뀐 신호등을 봤는지 횡단보도로 한 발을 내딛는다. 푸른 신호등은 점멸하는 중이었다. 엉거주춤하다 이내 발을 거두는 그녀의 가슴 떨림이 멀리서도 전해진다.


  집으로 가는 내내 간절하게 감사하다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의 감사함을 느낀 게 언제였더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 주어진 하루하루가 미지근하고 심드렁한 날을 보내고 있는 나는 그녀의 행운이 잠시 부럽게 느껴졌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 않는가. 생각해보니 나의 매일도 감사함의 연속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지극히 평화로운 날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한 일이다. 지금의 일상은 코로나라는 유리 천장에 갇힌 불안한 평온이긴 해도 오늘도 무사해서 감사하다.  


  차를 끌고 대형마트에 가지 않아도 일용할 모든 것들이 집으로 오는 배달의 왕국에 살아서 감사하다. 손가락만 까닥하면 무겁고 부피가 큰 물건이나, 작고 소소한 물건들이 현관문 밖에 대기한다. 특히 비가 오는 날 매사 귀찮아서 늘어졌다가 몇 가지 소소한 물건이 당일로 배달되면 우리나라의 배달 시스템에 절이라고 하고 싶다. 동시에 동시대를 살고 있는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들인 그 사람들이 나 대신 수고한 비용을 충분히 받아 그들의 삶도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언젠가 배달이 잘못되어 전화를 걸자 미안하다면서 배달원에게 주의를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급히 막았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잘못 배달될 수도 있는 거고 그걸 바로 잡으면 되는 것이지 그 사람들을 혼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나의 거듭되는 요청에 ‘감사합니다. 고객님’ 하면서 통화가 끝났다.

  나는 불평해도 좋을 것을 불평하지 않는 자신에 대해 감사한다.


  코로나가 시작된 후에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남편은 단체로 해야 하는 외부활동의 대부분을 접었다. 강제로 접힌 것도 있지만 자발적인 후퇴도 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지금까지 울타리 밖으로 나가기를 주저하는 그를 보면 어떤 때는 참 용하다 싶기도 하다. 오전 오후로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고 가끔 붓을 들어 난을 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그가 좀 더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열심히 하던 성당 봉사활동도 미루고, 친구들과의 식사 약속도 가능한 한 빠지는 것을 보면 어이구 소리가 절로 난다. 그의 소심함에 내가 ‘당신은 매사 그렇게 조심하니 백 살까지는 문제없이 살겠는데’라고 하면 손사래를 치면서 무슨 악담을 하냐고 펄쩍 뛴다. 밖으로 나가지 못해서 안달하는 나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는 그의 평정심이 때론 부럽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조신하게 행동한다면 방역당국의 긴장은 좀 줄어들고 사람들 간의 피로감도 좀 덜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도 감사할 일이긴 하다.

 

  예순 중반으로 내달리니 친구들이 여기저기 아프다는 소리를 한다.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얼마 전에 갑상선암 수술을 하고 지금 항암치료 중이다. 갑상선은 별거 아니라는데 후두 쪽에 암이 붙어 수술 후 약간 쉰 목소리가 났다. 그래도 친구가 치료를 잘 이겨내고 빨리 좋아지고 있어서 그것도 너무 감사하다. 마음이 후덕한 친구와 예전처럼 이곳저곳 빨리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크게 잘난 것은 없어도 아이들이 제 자리에서 각자 자기 몫을 하며 열심히 살고 있으니 그것도 감사하다. 나에게 무슨 감사한 일이 있겠나 생각하며 이것저것 꼽아보니 생각보다 감사할 일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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