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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Sep 03. 2021

3월의 마지막 날

터키에서

3월의 마지막 날, 눈이 내립니다. 푸른 보리밭 위로 하얗게 쌓이는 눈과 눈에 덮일세라 삐죽거리며 곤두서는 보리 싹이 선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붉게 핀 살구꽃과 매화꽃, 이름 모를 하얀 꽃 위에 다시 눈꽃이 핍니다. 꽃 위에 꽃을 피운 들판은 침묵 속에 빠져 있군요.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 중앙의 카파도키아 평원 아래 부드러운 화산 지형을 깎아 만든 지하도시 데린구유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믿음이 뭐라고 그 돌보아 주는 것 같지도 않은(불경스럽게도!) 신들을 위해 컴컴한 어둠 속의 삶을 펼쳤을까요. 흔적을 좇아 좁은 통로를 기어가는 동안 자꾸만 한숨이 나왔습니다.

어른 댓 명이 들어서면 꽉 차는 작은 광장, 학교와 교회, 맷돌의 흔적, 포도주 만들던 시설이며, 지상과 연결되는 환기구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차고 넘쳤습니다. 이 세상의 온갖 빛과 시시때때로 변하는 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멀리하고 어둡거나 덜 어둡거나 한 지하공간에서 웅크리고 살았을 그 시대의 아픔을 제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사방 어둑한 벽에 갇힌 채 어느 틈새로 흘러오는 희미한 빛이나 한 줄기 바람이 낯설어 모서리 아무 데나 쪼아대며 더 깊은 어둠을 찾아들지나 않았을까요? 지하 85미터, 지하 18층, 그런 숫자들의 의미보다 내가 디뎠던 단 몇 층의 공간에서 나는 질식할 뻔했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도 아이들이 태어나고, 어둠의 자식들이 된 그들은 다시 자신들의 삶을 대물림하여 그 세월이 300여 년이나 이어졌다지요.


얇은 종이를 세밀한 기계로 썬 듯 가늘게 폴폴 날리던 눈이 어느새 진눈깨비가 되어 차창에 툭툭 부딪치며 물방울을 만듭니다. 들판과 하늘의 경계가 모호해지더니 이윽고 하나가 된 듯합니다.

얼마나 달렸는지 바깥의 풍경이 변해가군요.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완만한 구릉지가 나타납니다. 저 멀리 몇 채의 집도 보여요.

작은 성 같이 보이는 것은 그 옛날 실크로드 대상들의 숙소입니다.

이스탄불에서 시안, 그리고 북경까지 실크로드를 따라 온전히 두발로 걸었던 프랑스 <르 피카로>지의 퇴직기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그 긴 여정을 <나는 걷는다>는 3권의 책으로 묶어 냈지요.

그의 발길과 시선에 나의 걸음과 눈길을 얹어 이 길을 헤매곤 했습니다. 관념 속의 나는 시간을 거슬러 낙타도 타고 대상들이 묵는 숙소의 문지기도 되었지요.  


구릉의 경사가 심해지더니 바위보다 작고 돌멩이라 부르기엔 모자란 야트막한 돌산이 나옵니다. 돌무더기 사이로 키 작은 관목들이 듬성듬성 서 있고요. 눈밭 속의 벌거벗은 나무들은 물기를 감싸 안아 더 검게 보이고 눈을 뒤집어쓴 바위들은 노인의 백발처럼 희끗거립니다. 눈송이가 굵어지더니 곧바로 하늘이 산을 덮습니다. 들판은 소리 없이 사라졌고 산기슭의 조막만 한 밭에는 한 뼘 넘게 자란 보리 싹이 간신히 고개만 뻘쭘 내밀고 있네요. 고도에 따라, 내리는 비의 양에 따라, 토양의 성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즐기는 것은 나그네의 기쁨이지요.  


산을 하나 넘었을 뿐인데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거짓말처럼 흰 눈은 흔적도 없고 진초록 침엽수림이 빼곡한 숲길을 버스는 달립니다. 양이 풀을 뜯고 꽃이 화사하게 피어있는 작은 마을들이 연이어 스쳐갑니다. 꽃을 보니 궂었던 마음이 환해지네요. 저 멀리 산자락에 밥풀 같은 하얀 꽃을 단 오렌지 나무가 이국의 풍경을 보여 줍니다. 그 곁은 익숙한 노란 유채밭이군요.


살아서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어서, 저 컴컴한 지하가 아닌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어서 아무나 붙잡고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길 위에 서서 온전히 가슴으로 길을 안으면 심장의 박동은 힘차답니다. 궁금하면 당신도 한번 떠나 보세요. 내일은 또 어떨지… 오늘은 이쯤에서 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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