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란 책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남녀의 차이에 관한 이 책은 1992년 미국의 존 그레이 박사가 30여 년간 부부들을 위한 상담센터를 운영하면서 지득한 부부간 갈등의 원인과 진단, 치유에 관해 기술한 책으로 남녀 관계 인식의 차이를 일깨운 역작으로 꼽힌다. 남자와 여자는 동일한 주제나 사물에 대하여 감정의 운용 방법, 행동의 표현 방식, 언어의 발화가 여러모로 다르다. 근본적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고 주관적인 입장에 맞춰 대화하다 보면 서로가 외계인을 마주하고 있는 듯 느끼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취향과 기호가 다른 남녀라면 그 차이가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경상도 지방에서 태어난 여자와 서울 출생인 남자가 어쩌다 평생을 함께하게 되었다. ‘어쩌다’라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면 죽고 못 살 정도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만하면’이라는 생각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사람은 앉은자리에서 간을 빼 갈 정도로 ‘미구(여우)’라는 설이 어린 시절 시골 동네에 퍼져 있었다.
내가 서울에 와서 살면서 그것은 근거 없는 말임을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서울 사람은 깍쟁이일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그 남자는 깍쟁이는커녕 시골 사람보다 더 순박하였다. 편안함에 이끌려 자주 만나다 보니 정이 들어 평생을 함께 하게 되었다.
170센티의 키에 당시 허리가 31 정도의 호리호리한 남자와 데이트를 하던 어느 날 남자가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어지럽게 자리를 옮겼다. 보다 못한 여자가 왜 그러는지를 물었다. 남자는 무안한 얼굴로 바람을 막아주려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왔다 갔다 했다는 대답을 내놨다. 아니 그 덩치 가지고? 속으로 실소를 했지만 마음 씀씀이 싫지는 않았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그래 이 사람과 함께라면 마음고생할 일은 없겠네.
결혼 후에 여자와 남자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퇴근길에 집에 들어온 남자는 늘 몇 가지의 물건을 들고 왔다. 손톱 깎기, 바느질 꾸러미, 신문, 껌 등 종류도 다양했다. 계속되는 소품의 출현이 어디서 난 것이냐는 여자의 물음에 남자는 버스에서 파는 물건이라고 했다. 직장이 있던 광화문 근처에서 종로와 동대문을 거치면서 집에까지 오는 동안 버스에는 여러 잡상인이 탔다가 내리는데 그때마다 하나씩 팔아주는 것이란다. 왜?라는 물음에 그 사람들이 물건을 팔아야 가족들과 따뜻한 밥이라도 먹을 거 아니냐는 이치에 맞는 듯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것이 우리 집에 필요하냐 안 하냐는 남자의 기준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으면 나중에 필요할 수도 있고 누군가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뜨내기장사의 물건이란 그리 튼실하지 않아서 실용성 면에서 가치가 없다는 것과 그런 물건을 쌓아 놓는 것은 가계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몇 번에 걸친 설교 끝에 물건을 가지고 오는 횟수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시장에 가서 흥정을 하려 들면 슬며시 지갑부터 열며 밑지고 판다는 상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남자를 보면서 여자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대책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대책 없는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여자는 먹는 것에 제법 신경을 쓴다. 같은 재료라도 요리의 방법에 따라 다양한 맛을 내는데 색깔로 비유하자면 샛노랗다, 노르스름하다, 싯누렇다, 노리끼리하다, 누르 틱틱하다 등 노란색으로 열 가지도 넘는 색채 변화를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음식에서도 간이 맞는지 센지 불 조절이 잘 되었는지 등으로 미묘한 맛의 변화를 감지하는데 비해 남자는 노랗다 한마디로 정의하는 식이었다.
맞벌이라 시간에 쪼들리면서도 아침밥과 저녁밥을 따로 하며 반찬 손질에 걸리는 시간과 밥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계량해서 밥상을 차리면 남자는 사분사분한 평소와 다르게 자발없이 대충 먹자라며 부아를 놓는다. 자작자작 알맞게 뜸 들인 밥을 그 열기가 잦아들기 전에 공기에 옮겨 담는 행복, 갓 찧은 쌀의 윤기에 삶도 자르르 흐르는 듯한 행복을 남자가 찬밥이 좋다거나 찬물에 말아먹겠다고 초를 칠 때 여자는 정말이지 남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밥을 꼭 먹을 분량만 하는 것은 얌통머리 없어 보여 반 공기쯤 넉넉하게 하는데 이것은 늘 남자가 차지했다. 처음에는 맛있는 밥을 두고 찬밥 타령을 하는 남자가 얄미워도 보였지만 실용성의 측면에서 괜찮은 일이라고 판단한 여자는 너그러워졌다. 그래서? 지금까지 찬밥은 남자의 몫이 되었다.
빵집에서 단팥빵과 카스텔라를 집는 남자와 베이글과 크루아상을 잡는 여자는 서로 맛없는 빵을 고른다고 흉을 본다.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 여자와 삼박자 커피를 좋아하는 남자는 상대의 취향에 삐죽 대면서 두 종류의 커피를 탄다. 식후에 과자를 즐기는 남자와 반찬은 빼먹어도 과일은 꼭 사야 하는 여자는 가끔 티격태격하지만 조화란 서로 다른 것들 속에 더 빛난다는 것을 안다.
틈이 나면 먹을 가는 남자는 화선지 위에서 희열을 느끼고, 짬만 나면 운동화 끈을 매는 여자는 이마에 부드럽게 스치는 바람에 전율한다. 품격 있는 휴양지에서 느긋하게 즐기려는 남자와 오지 배낭여행을 좋아하는 여자는 서로 물러날 때와 나아갈 때를 알아서 적당히 양보하고 적절히 쟁취하면서 오늘도 찬밥과 더운밥을 나눠 먹으며 따로 또 같이 수더분하게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