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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Aug 27. 2021

한강 백 리 길

걷는 날들

어슴푸레한 풍경 속에서 올림픽 공원 평화의 문이 양 날개를 펼치고 나를 맞는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한강 백 리 길을 걷는 날이다. 걷기 좋은 길을 따라 한강을 지그재그로 걷는다. 평소 걷는 양의 두 배다. 가장 많이 걷던 때보다 10km 더 걸어야 한다. 심호흡을 하며 길을 나선다. 아침 햇살을 받은 나무들이 곱게 빛난다.

 바람은 잔잔하게 불고 하늘은 높고 파랗다. 걷기에 최적의 날씨임을 몸이 먼저 느낀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넉넉한 보행 공간과 나무들이 반기는 광진교를 지난다. 붉게 물든 아차산이 한강을 더 푸르게 한다. 잠실 철교 난간에는 누군가의 목숨을 지키려는 생명의 전화가 강바람을 맞으며 섰다. 누군가의 손길이 저기에 닿기를, 아니 저것이 소용없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하며 걷는다. 빨간 꽃사과가 탐스럽게 달린 있는 길을 지나 탄천을 건넌다. 물빛이 먹빛이다. 생활 오수가 들어오나? 큼큼거리며 강물을 살피는데 다행히 악취는 없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우릴 스쳐간다. 서로 가볍게 인사한다.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들과 서로 길을 비낀다. 걷거나 운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해 그림자는 짧아진다. 등에 땀이 찼다. 겉옷을 하나 벗는다.


벌써 점심때다. 자리를 깔고 양말을 벗었다. 피곤해진 두 다리를 뻗어 쉬게 한다. 따뜻한 국물을 마시며 김밥을 먹는다. 커피와 과일로 에너지를 보충한다. 딱 절반이 남았다.

다시 채비를 챙긴다. 익숙한 잠수교를 지나 이촌으로 들어선다. 고향의 신작로를 생각나게 하는 미루나무들이 햇살에 윤기를 낸다. 억새와 스크렁도 나란히 가을을 빛낸다. 하얗게 핀 꽃은 허공에 날고 누렇게 말라가는 줄기는 강바람에 슬겅슬겅 한다. 군데군데 새로 심은 나무들이 반갑다. 어느 교각 아래 북극곰이 서 있다. 다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다. 강변의 분홍 펭귄 조각도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생각과 누군가의 땀이 깃든 작품에 감동은커녕 이질감이 드는 것은 내 개인의 취향인지는 모르겠다. 자연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있는 것이 좋더라. 절두산 성지에 해가 비껴 드니 슬픈 역사가 더 오롯하게 떠오른다. 어느덧  30km를 넘겼다.  


강물에 붉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던 햇살은 저녁을 먹고 나니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어둠이 급작스레 몰려든다. 정답게 앉아 노을을 바라보던 노부부도 보이지 않는다. 건너편 빌딩 숲에서 쏘아대는 빛들과 환하게 밝힌 양화대교의 조명이 강물에 드러눕는다.  

남은 거리는 8km, 다리가 뻐근해지기 시작한다. 포장된 노면의 딱딱함이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힘을 뺀다. 양화대교를 건너 선유도의 어둠 속에 드니 보름이 채 안된 달빛이 안간힘을 쓰듯 굽어본다. 묵언 수행자처럼 말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여의도 국회 의사당 근처에서 마지막 휴식을 취한다.


50대 중반 어느 날 내가 드라이플라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쁜 일상에 치여 좋다 나쁘다 외의 감정은 모조리 말라버린 날들. 계절이 가면 가는 대로, 오면 오는 대로 무뎌진 나날을 보내던 중이었다. 생명이 없는, 메말라서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그런 사람이 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무뎌진 감정을 찾고 건조해진 정서를 다시 찾고 싶었다.


걷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내가 무기물에서 유기물로 충전되어 감을 느꼈다. 날 선 감정은 부드러워지고 생기가 돌았다. 시들하던 삶이 건강해짐을 스스로 느꼈다. 시들고 말라버린 꽃이 아니라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지난 시간을 생각하는 동안 벌써 종착점이다. 저녁 8시다. 꼬박 12시간을 길에서 보냈다. 친구와 손뼉을 마주치며 완보를 축하한다. 수고한 내 몸을 가볍게 두드려준다.

 달빛과 불빛이 어우러진 여의나루에서 길어진 내 그림자를 본다. 나의 마음도 왠지 자란 것 같은 뿌듯한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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