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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창고 Sep 24. 2021

당령설산

동티베트오지 트레킹


이른 아침에 무야진타 사원이 보이는 빈관을 출발하여 당령촌으로 간다. 낯설지만 언젠가 본 듯하고,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 같은 풍경이 졸린 눈을 자꾸 비비게 한다. 포장도로가 끝나고 세찬 물이 흐르는 계곡이 길을 막는다. 들머리 한쪽이 뭉개져 아가리를 벌린 것 같은 다리를 이리저리 살피던 기사가 이윽고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건넌다. 산기슭에서 무너져 내린 잔돌이 대중없이 널브러지고 가끔은 지프차만 한 큰 바위가 굴러 떨어진 길옆으로 계곡이 따라붙는다. 붉은 단풍이 가득한 산비탈, 그 위에 걸쳐진 새파란 하늘, 두둥실 흐르는 새하얀 뭉게구름은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다. 햇살이 산란하는 노란 미루나무 사이로 분홍꽃을 잔뜩 매단 이름 모를 나무가 고개를 쏙쏙 내민다. 천당곡으로 불리는 계곡답게 수려하다.

풍경에 취하다 보니 어느새 마을 입구다. 굵은 장대가 길을 막는다. 말로만 듣던 통행료를 내는 곳, 길옆 비닐 움막에서 나온 사람이 한 사람당 20위엔의 마을 입장료를 받고 막대기를 들어 올린다. 오성홍기가 펄럭이는 몇 채의 집들이 우릴 반긴다.

당령촌 민박집

그럴싸한 민박집 2층 방은 대낮인데도 어둡다.

간단한 짐을 챙겨 주방 겸 휴게실로 간다. 높은 천장, 벽 한 구석을 매운 황동 주방용구들, 줄줄이 매단 붉은 등, 벽면을 채운 깃발과 메모들이 서로 시선을 잡아끌어 약간의 현기증이 난다. 자세히 보니 벽에 매달린 것은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다. 손수건, 티셔츠, 종이 등에 방문 날짜와 국가를 적었다. 자국의 여행사 깃발과 미국, 유럽 여러 나라, 호주…, 우리나라 것도 몇 개 찾았다. 내가 즐겨보는 세계테마기행도 있다.  

흰 죽과 삶은 옥수수, 따뜻한 차를 마시고 4km 거리에 있는 노천 온천으로 간다. 맑던 하늘이 갑자기 흐리더니 싸락눈이 내린다. 전날 해발 4000m 숙소에서 잠을 설친 터라 걸음이 힘겹다.


다음날은 날이 맑았다. 묽은 죽에 속이 빈 빵을 먹고 길을 나선다. 고산호수 후루하이(葫盧海)로 간다. 대략 7~8시간 거리다. 비교적 평탄한 페이지펑까지는 말을 타기로 했다.

장족 전통 옷을 입은 앳된 여자 마부들과 청바지에 재킷을 멋스럽게 걸친 열댓 살의 청년이 각자의 말을 몰고 민박집 앞에 섰다. 잘 손질된 말갈기가 마음에 들어 청년의 말을 타기로 한다. 사과 하나를 꺼내 말에게 준다. 오늘 잘 부탁한다는 나의 조공이다.

시작부터 길은 좁고 진흙탕이다. 질척대는 길을 말이 처벅처벅 걷는다. 울창한 숲길을 40여분 오르니 아담한 개활지가 나오는데 세상에! 그곳은 에델바이스 군락지였다. 청보랏빛 용담과 이름 모를 자잘한 꽃들 사이에 별 모양의 희고 소담스러운 꽃들이 피었다. 히말라야에서 제대로 못 본 꽃을 여기에서 대량으로 보다니 횡재한 기분이다.

개활지에 가득한 에델바이스

말이 쉴 동안 꽃과 눈 맞춤하다 다시 출발했다. 저만큼 넓은 초지가 나온다. 비행기가 내렸다 해서 페이지펑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말을 방목하는 목동이 산다. 카페를 겸한 목동의 집 앞에서 자전거를 타던 예닐곱 사내아이가 우리를 보고 밝게 웃는다. 안으로 들어서니 젊은 주인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이 마니차를 열심히 돌리고 있다. 양해를 얻어 종을 돌려보는데 생각보다 무거워 힘이 꽤 들어간다. 마부들은 콜라를, 우리는 따뜻한 수유차를 마시며 잠시 숨을 고른다.

이제 마부들과 작별할 때다.

페이지펑의 목동집 겸 카페

배낭을 고쳐 메고 천천히 산을 오른다. 사람의 발길이 드문 숲의 청정함에 온전히 나를 맡긴다. 활엽수림을 지나고 너덜길이 나오더니 곧 무성한 침엽수림이다. 울창한 원시의 숲이 하늘을 가린다. 희끗한 잔설을 모자처럼 얹은 바위는 시퍼런 이끼를 머금고, 맑은 물은 바위틈을 쿨쿨대며 흐른다. 계곡은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걸음은 느려진다. 두 시간 여 오르니 먼동이 트고 시야가 넓어진다. 갈대처럼 생긴 수생식물이 많아지는 걸 보니 호수에 다 왔나 보다.

후루하이

호리병을 닮아 후루하이로 불리는 이 호수는 해발 4160m 지점에 있다. 물이 줄어 군데군데 습지로 변한 호수에는 수초가 노랗게 물들고 만년설을 머리에 인 스다니산이 고요히 잠겼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전경에 나도 풍덩 빠진다.

주위가 부산스러워지더니 야영용 짐을 실은 말 몇 마리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온다. 짐의 무게가 엄청난 것을 보니 당령설산 종주팀 같다. 이 험한 산을 종주하는 그들의 체력과 시간이 부럽다. 다만 사람들의 방문으로 청정지대가 더럽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호수의 물이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는데 이것이 자연환경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함께 살아가는 지구의 한 부분이다. 동식물 자원의 보고이자 청정원시림인 이곳의 자연이 잘 지켜지길 바라면서 하산 길을 서두른다.

종주팀 말에 실린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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