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즈음부터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차를 두고 지하철을 타게 될 때, 누군가 또는 뭔가를 기다리게 될 때(은행이랄지 공공업무 등)를 대비해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지만 오랜 습관에 머물러있다. 지하철에선 주로 눈을 감고 은행에선 어서 이 소란에서 나가고 싶어 신경을 곤두세운다. 집중할 수 없는 공간이라고 여기면서, 언제 어디서건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전천후 독서가로서의 지위는 자멸하고 말았다.
드문드문 보석같은 글을 올리는 익명의 편집자(로 보이는 이)의 블로그를 보다가 좋은 소설을 읽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인문사회과학시사평론 다 좋지만 좋은 소설은 그 어떤 '좋은'보다 좋다. 블로그에 언급된 작품들이 딱히 구미가 당겼다기보다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쓴 신실한 응원과 염려와 황홀이 좋았다. 맞아. 사람들은 저런 마음으로 책을 읽지.
눈썰미 좋은 출판사에서 처녀작을 시작으로 나온 두 번째 책 '작별인사는 아직이에요'는 읽은 지 석달쯤 지났는데 뭘 적지를 못하겠다. 작가의 전작 '나의 두사람'도 그렇고 이번 책도 그렇고 작가는 가족 이야기 말고도 좋은 글이 나올 준비를 마친 사람 같다. 차분차분 앞으로도 오랫동안 글을 써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뭘 적지 못하겠는 이유는 연로한 어른이 등장하는 가슴시린 이야기들을 읽자니 내 엄마의 머잖은 미래를 보는 것 같았고 책은 내게 고령의 노인을 위한 안내서처럼 갑갑하고 먹먹했어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장편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멸한 전천후 독서가로서의 지위를 탈환할 수도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준다. 어서 읽어야지 안달할만큼 좋은 소설의 요건을 거의 다 갖췄다. 방대한 두께만 빼고. 그렇기때문에 아무 곳에서 꺼내읽기보다 사려깊게 읽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설 이후로 하루 열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말이 필요없이 좋아하는 작가인데 다른 작품들을 돌아 조금 늦게 만났다. 변동폭 없이 소설마다 최고 수준을 유지한다는 건 결국 작가의 삶 자체가 소설이라는 뜻.
책꽂이를 살펴봐야 기억날 소설 한 권과 필요에 의해 읽은 생태관련 서적이 있지만 남은 인상이 없다. 올 겨울 나의 책곳간은 빈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네. 아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