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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Nov 19. 2018

가을 감 나무


잎이 실해서 글을 써도 좋을 문

가지가 단단해서 화살촉으로 쓰였으니 무

겉과 속이 같아서 신하의 충정을 표현해온 충

다익은 열매가 부드러워 이가 없는 노인에게 알맞아 효

임금을 향한 절개의 상징으로 쓰인 감나무의 절


숲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면 몰랐을 '문무충효절' 감나무의 은유들.


나는 이 감나무가 자라 열매맺었을 어느 고장의 햇살을 생각한다.

물 오른 가지에 꽃 피우고 열매 달아 익기를 기다린 시간을 간절하게 바라본다.

주인 남자와 여자, 그네들의 줄줄이 자식들이 드나들며 소란했을 어느 집의 마당을 그려본다.


일터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았으나 버는 족족 자식들 입을 메우느라 허기졌던 남자의 지갑과

달빛같은 피부가 곰삭도록 자식들 해먹이는 일만 골똘해온 여자의 바쁜 무릎과

목소리와 어깨 굵기가 키만큼 자라난 아름드리 아들들과

귀밑머리 찰랑이며 새초롬하게 여문 여릿한 딸들을

아껴 바라본다.


마당에 감나무가 있었다.

지나는 이웃은 물론 처음 본 사람들도 나무 아래 서서 허허 하고 감탄했던 나무였다.

해마다 조막만한 알멩이가 빛처럼 눈물처럼 속살을 부풀릴 때까지

우리가족 손이 닿기 전엔 떨어질 줄 몰랐던 주홍빛 열매들.


그냥 한 해를 함께 살았을 뿐 아무것도 한 게 없으나 일년 내내 우리 가족의 일년치 희노애락을 겪어낸,

그 감나무를 추억한다.


서울에서 내려가면 엄마는 아직 땡감이 달린 감나무 가지를 종이가방에 넣어주셨다.

문지방에 높이 매달아두면 일주일이면 맛있게 익을 거라고.

나는 시킨 대로 며칠을 매달아두었다가 팽팽하게 익은 열매를 요리조리 훑고 빨았다.

내 맘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서울살이,

집에서 가져온 열매 하나가 시린 등을 다독이며 말을 걸어주었다.


겨울은 금세 지나갈 거야.

하지만 견뎌야 해.

시간을 담보하지 않은 열매는 없단다.


감나무 포도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집안의 과실수를 기가막히게 가꿔온 분은 아빠였다.

열매 한 알을 두고 참 많은 비유를 해주셨는데, 들을 수가 없다.

너무 일찍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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