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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May 21. 2019

명랑한 눈뭉치

이름도 어여쁜 참미소 참외와 푹 익은 아보카도를 아침으로 먹었다

내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나. 요샌 과거의 풍경들이 별안간 온 몸을 덮친다. 그럴 때마다 짧게는 십여초? 길게는 몇 분 옴싹 못하고 그 자리에 묶인다. 추억의 아교에 붙들린 시간.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어제 수납장을 고쳐주러 온 AS센터 직원이 알려준대로 '방충망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앞으로 나와있는 창 쪽으로 방충망 위치를 바꿔주'었다. 이래야 곤충이 못들어온단다. 티비 쪽으로 거실창을 열고 소파에 앉으니 바람이 한숨 돌아들어와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 새소리가 들리고, 바람은 보드랍고, 나는 막 스트레칭을 끝낸 참이었다.


커피를 내리려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서래마을에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깨끗한 물에 발을 담근 듯 상쾌한 행복감은 곧바로 나를 어느 겨울로 끌고 들어갔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는 서래마을 주택가 5층건물의 세개층을 쓰고 있었고, 나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에서 음악과 글 두 가지 일에 몰두했었다. 그러고보니 그때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로 하루하루를 채워가고 있었구나. 그땐 행복이 뭔지 몰랐음이 틀림없어. 그 즈음을 순간만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4분의 2박자로 뛰는데-


눈이 많이 왔었다. 회사 주변 숲이 소복했다. 우린 모두 젊었고 감성충만한 컨텐츠 기획자들이었다. 점심먹고 오는 길, 누군가 눈을 뭉쳐 앞 사람 외투 속에 집어넣었고 일순 눈싸움이 시작됐다. 팔분음표처럼 명랑한 눈뭉치가 우리들 옆으로 투두둑 떨어졌다. 시작이 그러했듯 마무리도 여기저기서 옷섶의 눈을 터는 소리, 시덥잖은 농담과 웃음소리가 어우러지면서 끝이 났다. 장조풍의 만화 주제곡처럼 즐거운 기억 하나로만 완성되는 노래.


오늘 아침 내 기억을 느닷없이 비집고 들어온 건 이날의 눈싸움이 아니라 어떤 얼굴이다. 하나둘씩 자리를 찾아가고 난 뒤, 사무실에 들어오는 그의 얼굴을 가장 먼저 본 것은 나였다. 숨을 몰아쉬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 다가가는 나에게 그는 손을 홰홰 저으며 말했다. 오래 뛰면 하아 하아 심 심장이 하아 하아 터질 것 같 하아하아 아 하아하아

이 사람 지병이 있나봐 그것도 심장병이. 놀라고 안쓰러워서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그가 다시 말했다. 사람들한테는 하아하아 말하지 말거라 하아하아  

그는 내 팀장이었다. 이토록 가슴아픈 아니 실제로 가슴이 아픈 병이 있으면서도 동료 선후배들과의 추억을 망치지 않기 위해 놀이를 주도하며 눈밭을 뛴 건가 생각하니 내 가슴도 아파왔다. 십수년도 전 이야기로, 나는 지금보다 훨씬 초박형의 팔랑귀를 가진 이십대였다. 누구라도 수십분 동안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 뛰어놀다보면 숨이 차고 얼굴이 빨개진다. 동료들을 한 명이라도 더 때려맞히겠다고 전력질주하다보니 남보다 더 숨이 차올랐을 터. 여튼 그때부터 그는 한동안 내게 허약한 체력을 뛰어넘어 강철을 뚫을 굳은 심지를 가진, 마치 상록수의 심훈같은 존재로 인식됐지만 허상이란 게 늘 그렇듯 오래지 않아 또 하나의 유쾌한 사건으로 깨지고 말았다. 이날의 이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심장이 간질간질 그립다.


그 겨울은 눈이 많이 왔다. 아이젠을 발에 끼고 출근하는 후배가 있었고, 눈길에 차가 미끄러져 하마터면 크게 번질 교통사고도 있었다. 많은 사랑을 받았던 나의 음악에세이가 있었고, 지난 사랑에게 마침내 안녕을 고하던 작별의 순간이 있었다. 많은 것들이 거기 그대로 남아 있다.


기억은 참으로 정처 없다. 그저 눈 온날 점심시간과 어떤 얼굴이 떠올랐을 뿐인데 아찔한 슬픔, 먹물같은 후회의 기억들이 앞뒤로 편집돼서 뒤죽박죽의 감정이 되어버렸어. 어떤 추억을 떠올리면서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다. 사나흘 울던 검은등뻐꾸기는 이제 울지 않는다. 짝짓기가 끝났다는 뜻이다. 어느 겨울날의 추억은 여기서 접자. 2019년의 여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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