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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은영 May 26. 2019

사랑을 없애는 방식

 

오빠가 나를 버렸어.

그녀가 말했다.


처음 '오빠랑 헤어졌어' 라는 말을 들을 땐  좀 놀랐고 '실은 오빠가 나를 버렸어' 라고 그녀가 정정했을 땐 많이 서글펐다. 3년을 햇살과 바람, 등대와 그림자처럼 갸웃이 사랑해온 두 사람의 이별이, 그 이별을 수습하는 방식이 또한 놀랍고 서글펐다.

   

나로 말하자면-

사랑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방식이라고, 사랑이 끝나면 울고불고 짓고 까불던 감정의 허물만 남는 거라고 그래서 사랑은 환상이라고 날선 저주를 퍼부어왔다. 나는 늘 사랑의 패배자였다. 허약한 감상주의자, 이기적인 자기연민의 화신, 불안정한 낭만주의자가 사랑에 빠질 때의 내 모습이다.

이런 내가 사랑하면서 가장 두려운 건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순간이 올까봐서다. 그가 나를 떠나는 상상은 아프지만 두렵지는 않다. 남은 감정을 차곡차곡 수습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에 대한 사랑의 상실은 나조차 눈치채지못할 만큼 치밀하게 진행되므로, 인지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상태로 벽을 치고 마는데, 그런 내가 끔찍하다.


그녀의 남자가 불안했던 건 이런 내 모습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열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부서져라 그녀를 끌어안을 때의 떨림을,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던 시간들을 보았다. 이후로도 그는 한결같았다. 그는 반역을 모르는, 항거불능의 사랑에 빠진 낭만적인 포로였다. 한때 내가 그랬듯.


허나-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방식에 대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영 이상해서다. 나는 상대를 사랑하기앞서 사랑하는 방식을 사랑한다. 나의 방식에 맞춰서, 나의 방식에 도취돼서, 나의 방식이 지칠 때까지 사랑한다, 그 뿐이다. 때문에 내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 두렵다. 이걸 인정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내 연애가 불덩이처럼 뜨거우나 툭하면 이지러지고 희비의 쌍곡선을 오가며 불온한 까닭은 내가 택한 연애의 방식이 이 지경이므로.


남자는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내가 너를 떠날 때는 문자고 전화고 없이 어느날 사라질 거야.

그녀가 이랬다지. 굳이 그러지 마. 얼굴 보고 헤어지면 되지 뭐하러 그래.


주말마다 만나서 장보러가는 일상을 처음으로 깨트리고 이틀동안 연락이 없었을 때 그녀가 톡을 남겼다. 그는 읽었고 대꾸는 없었다. 전화를 하거나 그의 직장으로 찾아가거나 집 근처에서 기다릴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그런 방식을 모르는 여자다. 사랑하는 방식은 찰나로 시작해 점차 교집합을 넓혀갔겠지만 이별하는 방식은 칼로 도려낸 듯 정반대였다. 그래서 통했다. 사랑을 능동적으로 키우고 힘에 부치게 소진한 남자는 여자를 떠났고 제 자리에서 사랑을 받는 데만 익숙한 여자는 다시 식물처럼 남겨졌다.


퇴로를 끊고 절벽을 건너는 병사처럼 남자는 다시 오지 않을 방식으로 그녀의 제국을 떠났다. 돌아가는 방법은 하나였다. 그가 방금 끊어낸 좁고 긴 출렁다리. 식물성의 그녀가 그를 찾아나설리 만무하다해도 속마음은 아직 더운 걸 남자는 안다. 하여, 다시 그 품에 머리를 묻고 싶어질까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그녀를 떠났다. 여자가 부친상을 치른지 보름만의 일이었다.


나는 그녀가 되도록 많은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울먹이고 격앙되고 회한에 젖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럴 땐 혼자보다 들어줄 상대가 있는 게 한결 낫다.


생각해보니까 오빠는 아버지 장례 끝날 때까지 기다렸던 것 같아. 누구보다 내 삶을 이해해주던 사람이 가장 힘든 시기에 나를 버리고 사라졌어.

언제부터였을까. 오빠가 나랑 헤어지려고 마음 먹은 게...


하필 이 시기에 떠나다니 정말 잔인한 놈이라고 실컷 욕해줘야했을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이별은 서글프고 마음아팠지만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방식이니까.

나는 욕해주는 대신 바로 지금 그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라고 한껏 부추겼다.


남자나 여자나 가장 섹시할 때가 언제인 줄 알아?

막 실연해서 얼굴에 허무하고 고독한 틈새가 덕지덕지 붙어있을 때라고.

그때 스미는 사랑이 정말 꿀맛이야!


그녀가 울다 웃었다.


둘 다 손에 쥔 패를 다 써버린 게임에서 눈물바람으로 옥신각신해봐야 시간낭비다. 남은 감정을 수습하는 건 아무도 모르게 해치워야 한다. 나이 먹는다고 실연에 담담할 수 있으랴. 사무치는 쓸쓸함과 정처없는 욕망을 쥐도새도 모르게 털어내는 법을 배워가는 것, 세월이 주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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