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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리 Sep 28. 2021

기획자가 되고싶다

컴맹에서 IT 서비스 기획자가 되기까지


나는 어렸을 때 부터 상당히 컴맹이었다. 꽤나 보수적이었던 우리 엄마는 초등학교 시절 내내 나에게 컴퓨터를 쓸 수 있는 자유시간을 일주일에 단 30분 밖에 주지 않았다. 90년대 초중반생이라면 한 번쯤은 해봤을 버디버디도 해본 적이 없고, 타자 수행 평가는 최저점을 맞았었다.


반강제적으로 컴퓨터와 거리두기 하며 어린시절을 보낸 난 지금도 여전히 타자 속도가 느리며 투두 어플리케이션을 활용하는 것 보다 직접 플래너에 할 일을 적고 형광펜으로 완료한 태스크를 지우는 것이 더 편하다. 분명 나는 꽤나 아날로그적인 사람으로 자랐고 또 스스로 아날로그적인 가치들을 선호한다. 그런 내가 모바일 서비스를 기획하는 일을 하고 있다니. 스스로도 가끔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도대체 어쩌다가 서비스 기획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현재 가장 최신의 기술을 다루는 사람들과 몹시도 디지털스러운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게 된 것일까?





내 대학시절 주전공은 '생활디자인 (Human environment & Design)'이다.


생활디자인 학과 소개

 인문학적 지식과 디자인 철학을 토대로 인간 생활문화의 비전을 제시하고, 기획, 실현하고자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인 디자인 교육을 실시하며, 제품, 패션, 시각 디자인 분야의 학제적 접근에 기초한 통합적 조형교육과 통합적 기획 교육을 통하여 폭넓은 디자인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전문인을 배출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오늘날 디자인은 제품의 기획과 생산을 넘어 당 시대의 새로운 가치와 생활문화를 만들어내는 디자인이 주목받고 있으며, 디자인 사고 (Design Thinking) 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문화적, 산업적 혁신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인간, 생활, 환경을 기반으로 한 생활디자인학과의 통합적 디자인 교육은 이러한 시대적 가치를 반영한 것이다.

출처 : 연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홈페이지


고3 때 뭘 디자인하고 싶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어서 지원했던 학과였다. 위의 설명 처럼 시각, 제품, 패션 디자인 등 다양한 카테고리의 디자인을 경험해볼 수 있었다.


삽질의 역사

하지만 역시 보는 것과 그걸 실제로 만드는 것은 너무 달랐다. 나는 안타깝게도 Designing 에 전혀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고, 반대로 재능 있는 친구들은 너무 많았다. (특히 제품 디자인 쪽은 정말 최악이었다.)


'음, 그래 그냥 나는 아름다운 것들을 눈과 돈으로 소비하는 걸 잘하는 사람이야.'


그렇게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은 빠르게 접어버렸고 2학년 2학기가 되었다. 난 그 학기에서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어준 수업을 수강하게 된다.


'User Interface Design'이라는 수업이었는데 전반적인 UX process 에 대해 공부하고 실제로 서비스를 기획해서 안드로이드 디자인 가이드에 맞추어 UI 디자인까지 해보는 수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너무 잔인한 커리큘럼이었던 것 같다. 저 모든 것을 고작 3개월 만에요..? 교수님 제발...)


내가 속했던 팀은 지나간 대화에 가치를 부여한다라는 컨셉의 메신저 서비스를 기획하였는데, AI 기술을 활용한 대화 키워드 추출 및 메시지 좋아요/책갈피 기능을 활용한 아카이빙 기능이 주요 기능인 서비스였다. (약간 소름인 것은 지금 내가 속해있는 조직에서 하는 일과 상당히 유사한 프로젝트였다.) 일상에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메신저 서비스에서 겪고 있는 Pain point 를 찾아내고 인터뷰를 통해 Pain point 의 원인과 해결 방법을 도출해내며 UI 디자인까지 완성했고, 그 결과물은 꽤 만족스러웠다. 학점도 잘 받았었지만 그보다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 자체가 즐겁고 재밌어서 매우 기억에 남는 수업이었고 이 수업을 계기로 모바일 서비스를 만드는 직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수업에서 접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UX 방법론들은 나에게 꽤 인상적이었고 그 프로세스에 맞추어 차근차근 프로젝트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그 어떤 수업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흥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뭐든 스스로 납득 가능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움직이는 내 성격상, 다른 그 어떤 디자인 분야 보다 '합리성'이 중요시 되는 UX 분야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던 것 같다.


그 전에 수강한 다른 디자인 분야의 수업들은 결국 시각적으로 예쁘고 아름다운 것이 중요했다. 그 결과물이 나오게 된 배경, 이유 보다는 결과물 그 자체로 평가받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나도 무언가를 구매할 때 항상 '이쁜게 최고야 짜릿해'를 외치는 사람으로서 그게 중요하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관련한 나의 재능은 부족했고 또 성격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흥미롭다고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패션 브랜드 기획 수업

위 수업을 수강한 이후로는 꼭 모바일 서비스가 아니더라도 '기획'과 관련된 수업을 다수 수강했다. '패션 트렌드 기획', '의류 디자인 및 기획'과 같은 것들이었는데 주로 아웃풋을 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 단계에 집중하는 수업들이었다. 왜 이런 소비자들을 타겟팅했는지, 왜 이 제품이 이 타겟에게 잘 팔릴 것 같은지, 이 컨셉은 어떻게 도출된 것인지 와 같은 것들은 매끄럽고 엣지있게 다듬는 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 아웃풋이 모바일 서비스가 아니었을 뿐 아웃풋을 내는 사고의 과정은 거의 비슷했기 때문에 위 수업들도 기획자 마인드를 갖추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Double diamond design process

전공 수업들을 들으며 나는 전체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조형적인 실체화' 보다는 '목적을 설계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문제점-해결방법-결과물(디자인) 삼박자가 딱 맞아 떨어졌을 때에 느껴지는 뭔지 모를 쾌감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내 특성이 IT 서비스 기획자 포지션에 잘 맞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여기까지 내가 서비스 기획자로서의 커리어를 밟게 된 '첫 걸음'에 대한 이야기였고, 이후 서비스 기획자가 되기 전에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해왔는지는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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