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극도의 I가 사람들을 모으다

by 조우성 변호사

<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15) 극도의 I가 사람들을 모으다


#1

어느 날 재판을 하러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갔을 때, 법원 로비에서 양복을 입은 어떤 분이 내게 인사를 꾸벅했다. 누구?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안녕하세요, 저 지금 법원에 있습니다.” 말하는 투가 판사 같았다. 판사 말투(?)가 따로 있다.

“저.., 예전에 에프원에서 활동했었습니다. 그때 올리신 뚜벅이 변호사의 하루, 잘 읽었고 많이 참고 되었습니다.”

아... 에프원. 나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덕담을 주고 받고 헤어졌다.

옆에 있던 후배 변호사가 내게 물었다. “선배님, 에프원이 뭔가요?”

하... 에프원. 그걸 설명한다면 말이지. 이거 말이 길어진데이. 참고 들을 수 있겠는감?


#2

1992년부터 시작된 신림동 강의가 1996년, 군법무관 말년차까지 이어졌다. 지방(논산)에서 벼법무관 생활을 했기에 한 번씩 주말에 서울 올라가면 몰아서 강의를 했다. 어떤 날은 오전 9시부터 밤 10시 반까지 한번에 강의를 했다. 중간에 점심, 저녁 먹는 시간 빼고는 몰아치기로 하는 초집중 단기코스. 그땐 힘든 줄도 모르고 신나게 했었다.

당시 한 장면이 기억이 남는다. 그날도 강의를 마치고 가방을 챙겨서 내려오려고 하는데 한 수강생이 잠깐만 시간을 내 달라고 했다. 근처 커피숍으로 옮겼다.

공부에 관한 이야기를 이것 저것 나누다가 그 친구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저... 이런 말씀드리면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저...”

뭐? 말해보소.


#3

“제 누나 한번 만나보시지 않으실랍니까? 제 누나가 음악전공하고 인물도 괜찮습니다.”

난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 했다.

“그게 무슨....”

“아, 딴 게 아니고. 쌤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딱 좋아할 상입니다. 우리 아버지, 저보고 누나 신랑감 한번 찾아보라고 엄청 갈구십니다. 저희 집 좀 살거든요.”

하하하... 난 솔직히 내 강의가 좋았다는 평가보다 이 친구의 평가가 더 마음에 들었다. 기분이 무지 업 되었다. 적절히 겸양의 말을 나누고 헤어졌다. (이 이야기는 아직도 다양한 버전으로 변화시켜 내가 나를 자랑할 때 주위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레시피가 되고 있다).

워낙 열성적으로 강의하다보니 와이셔츠가 땀에 젖기 마련이었는데, 어떤 수강생은 와이셔츠도 선물해주고 그랬었다(그 분은 여성). 실로 그 때가 나의 전성기였다. 이런 식의 강의뽕들을 계속 맞고 있었다.


#4

이렇게 수강생들을 다양하게 만나다보니 그들의 고민을 알게 되었다. 지방 고시생들도 학원 강의를 듣기 위해서 신림동까지 와야했는데 숙식비, 학원비 다 합치면 한달에 돈이 꽤 들었다. 뭔가 이 문제를 타개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고민이 되었다.

그러다 1994년경부터 PC통신이 본격화되었고, 나 역시 하이텔(01410)을 열심히 사용했다. 1996년 11월경, 나는 하이텔에서 ‘법촌(bubchon)’이라는 동호회를 발견했다. 법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었는데, 나는 거기서 내가 갖고 있는 고시정보자료들을 하나씩 올리고 질문에 대한 답변을 달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지기 내가 법촌에서 주목을 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자료를 꾸준히 올려주는 사람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5

그런데 내가 법촌 내에서 본의 아닌 주목을 받게 되자, 기존 법촌 사용자들이 다소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이때부터 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다양한 현상들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정보를 계속 올리고 싶었는데, 나의 행위가 법촌의 기존 Identity와는 좀 안 맞는 듯 했다. 셋방살이로서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 그래서 고민하다가 독립을 하기로 했다. 나도 동호회를 하나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하이텔에서 동호회를 만들려면 여러 명의 발기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쉽게 작은 동호회(sg; small group)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sg230’이다. 고유한 이름은 없이 숫자로만 불렸지만 작은 그룹을 하나 만들고 내 자료를 다시 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6

sg230 시절은 금방 끝이 났다. 그만큼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나도 정식 동호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만들어 진 것이 ‘F1’이고, 나는 대표시삽(시삽... 아, 얼마만에 들어보는 이름인가)이 되었다.

완전한 우리 공간이 만들어졌으니 나는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할 수 있었다. 고시별로 방을 따로 만들고(사시, 행시, 외시, 기술고시, CPA), 자료실도 만들었다. 각 시험별로 시삽을 정하고 나니 체계가 잡혔다. 나는 대표시삽으로서 게시판에 꾸준히 글을 올렸다. 자료도 올리지만, 고시생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그런 글들을 올리고 싶었다. 완전 감정 과잉의 시대.

그때 내가 올리는 글들의 코너 제목을 정했는데 그것이 바로 ‘뚜벅이 변호사의 하루’다. 당시 나는 차가 없어서 뚜벅이였다. 뒤에 차가 생겼지만, 나 역시 초보 변호사로서 초심을 잃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겠다는 마음을 담을 수 있어서 ‘뚜벅이 변호사’라는 닉네임을 사용했다.


#7

많은 고시 아웃사이더들이 도움을 받았다. 처음에는 나 혼자 자료를 올렸지만 이내 다른 이들이 좋은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보도 정보지만 외로운 수험생 생활에 한줄기 숨을 쉴 수 있는, 그리고 어깨를 기댈 수 있는 쉼터로서의 기능도 했다. 나는 태평양에서는 완전 말단 병아리변호사지만 온라인 에프원에서는 대표시삽으로서 책임감과 소신을 갖고 모임을 운영했다.

그때 솜털 뽀송뽀송하던 대학생이 나중에 사법시험 합격해서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까지 되는 일도 있었다.

난 MBTI 검사를 해보면 극도의 I로 나온다. 사실 강의하는 사람들은 I 성향이 많다. 강의는 혼잣말 하는 거다. 내가 모임을 많이 하는 걸로 봐서 나를 E로 알곤 하는데, 나는 극도의 I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본의 아니게 모임이 만들어지면서, 나의 대표시삽 인생은 그 뒤로도 꽤 오래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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