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밀레니엄 버그, Y2K

by 조우성 변호사

<뚜벅이 변호사, 태평양 로펌 가다>(16) 밀레니엄 버그, Y2K


#1

1999년 12월 31일. 밤 11시 59분.

나는 시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정되기까지 50초 전.. 40초 전... 20초 전..10초 전.. 5초 전.

침을 꼴딱꼴딱 삼키고 있었다. 초 긴장상태


#2

1999년 여름. 나는 태평양 내 IP(지적재산권)팀에서 3년차 주니어 변호사로 열심히 깨지면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문제가 하나 있었다. 소위 ‘밀레니엄 버그’, Y2K문제.

당시 IT 업계에서는 2000년 1월 1일이 되면 전산시스템에 엄청난 오류가 발생해서 시스템이 다운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이 문제의 핵심은 20세기 동안 많은 컴퓨터 시스템과 소프트웨어가 연도를 두 자릿수로만 저장하고 처리했다는 데 있었다. 예를 들어, 1998년은 '98'로, 1999년은 '99'로 표시되었는데 이러한 시스템에서 2000년은 '00'으로 표시되어, 컴퓨터가 이를 1900년으로 오인하거나 다른 계산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 이를 ‘밀레니엄 버그’라 했고, Y2K문제라 칭했다.

당시 나는 전자신문을 받아보고 있었는데, 이거 이거 문제가 심각해 보였다.


#3

그러다 번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우리 태평양이 이 문제를 선도적으로 준비하고 솔루션을 갖고 있을 수 있다면 꽤 괜찮을 것 같았다. IT에 강한 느낌을 줄 수도 있고.

나는 혼자 이 문제를 빌드업하기 시작했다. 외국 자료를 찾아보면서 간략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당시 대표업무집행변호사인 오용석 변호사님을 찾아뵙기로 했다.

3년차 변호사가 대표업무집행변호사님 방을 그냥 찾아가는 것은 무슨 깡으로 가능할까? 나 역시 밀레니엄 버그에 감염되었던?


#4

“그래, 무슨 일....?”

갑자기 주니어 변호사가 면담 신청을 하니 오 변호사님도 당황하신 듯.

나는 세상이 곧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이 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2000년 1월 1일이 되면 상상치도 못할 대재앙이 발생할 수 있는데, 하지만 잘하면 우리 사무실에게는 엄청난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블라블라.

내 말을 흥미롭게 듣고 계시던 오 변호사님의 첫 마디.

“조 변. 요즘 일이 좀 한가한가?”

네? 아... 그건 아닌데. 바빠 죽겠는데...

역시 오변호사님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계시는구나. 나는 외국 자료를 보여 드리며 계속 열변을 토했다.


#5

“그래. 그럼 내가 뭘 해주면 되나?”

역시 대표변호사님은 단도직입적이시구나.

“네?”

“자네가 내게 이런 걸 말했으면 뭔가 요구사항이 있을 거 아닌가?”

아...네. 요구사항이라. 이건 미처 생각 못했다. 사실 뭐 따로 요구할 건 없는데...

“아니 그냥.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우리가 준비를 해야 하고...”

“자네가 준비해 보게.”

“아!? 네. 그럼 제가 준비해 보겠습니다.”

좀 이상하게 회의가 흘러갔다.

머리를 긁적이며 나오는데 대표님이 한 말씀 하셨다.

“만약 자네가 말한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때는 TFT팀을 만들 걸세. 그땐 자네가 팀장이 될 수도 있겠어. 잘 준비해 봐.”

우와!!!! 뭐지? 팀장? 내가? 3년차가?


#6

기존의 일로 바빠 죽을 지경이었지만 나는 ‘Y2K 밀레니엄 버그 대책 TFT 팀장’으로 셀프 임명하고 사명감에 빠져서 앞으로 닥칠 전 지구적인 재앙에 대비했다. 한시가 급했다. 밀레니엄 버그가 발생하면 다양한 법적 이슈가 제기될 수 있었다.

1) 계약 이행 실패: 기업들이 Y2K 문제로 인해 계약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 법적 책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

2) 제품 책임: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제조업체들이 제품 결함으로 인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수 있음.

3) 보험 문제: Y2K 관련 손해가 보험 정책에 의해 커버되는지에 대한 문제.

4) 정보 공개: 기업들이 투자자들에게 Y2K 준비 상태를 충분히 공개하지 않아 발생하는 증권 관련 소송.

5) 고용주 책임: Y2K 문제 해결을 위해 추가 근무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노동 관련 분쟁.

6) 개인정보 보호: Y2K 문제로 인한 데이터 유출이나 개인정보 침해 문제.

7)국제법적 문제: 다국적 기업들 간의 Y2K 관련 법적 분쟁.

야... 생각할수록 이건 한 부서가 아니라 로펌 하나가 담당해야 할 수준이었다. 옆 방 선배 황보영 변호사가 “조변, 요즘 왜 이리 심각해? 뭔 일 있어?”라고 물어보았다. 난 극도의 보안이 필요했다. 멋쩍게 웃으며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쿨하게 답했다. 이런 일은 이래서 외로운 거라고 곱씹었다.


#7

꽤나 많은 자료를 준비했다. 그리고 대책을 위한 액션플랜도 준비했다. 주니어 3년차가 특별 태스크포스의 팀장이 된다는 발표를 하면 선배들, 동기들의 표정이 어떨까?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그래, 이런 새로운 일을 개척하는 게 진짜지.


50초 전... 40초 전... 10초 전... 5초 전... 땡,

드디어 2000년 1월 1일이 밝았다.

짜잔...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예전과 같이 너무나 평온했다. 뭔 개뿔 밀레니엄 버그. 내 컴퓨터는 잘만 돌아갔다.


#8

나는 ‘Y2K 밀레니엄 버그 대책 TFT 팀장’직에서 과감히 셀프 하차했다.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하지 않았던가.

정확히 1년 후 나는 또 하나의 보고서를 들고 오용석 변호사님을 찾아간다. 오 변호사님은 상당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이번엔 또 뭔가...”

그때 나는 보고서 하나를 책상위에 자신있게 내려 놓았다. 그 보고서의 제목은 “로앤비 프로젝트”였다. 두둥!!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5) 극도의 I가 사람들을 모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