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을 나누는 몇 가지 방법.
사무실로 출근을 하는 직장인은 어제의 생존 전략과 오늘의 생존 전략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기압인 상사 피하기, 겨울이면 미니 난로 준비하기, 탕비실 잘 털어보기 등등. 하지만 비행기로 출근하는 우리는 날마다 생존 전략이 크게 달라진다. 그 이유는 바로 모든 비행이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비행은 길이, 도착지 또는 출발 시간에 따라 완전히 다른 비행으로 분류된다. 비행시간에 따라 구분을 하자면 초단거리,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초장거리까지 다섯 가지로 나뉜다. 굳이 비행시간에 따라 구분 지어 놓는 이유는 간단하다. 비행시간이야말로 알파와 오메가로 비행의 모든 것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대하는 승무원들의 자세는 경건하기만 하다. 오늘 내가 가는 비행이 얼마나 긴 비행인지에 따라 가방 내용물, 메이크업 진하기 게다가 공항으로 향하는 마음가짐까지. 똑같은 출근길인데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진다.
우선 가장 짧은 초단거리 비행을 살펴보자. 말 그대로 정말 짧다. 1시간 내외로 떴다 떴다 비행기 노래가 끝나기가 무섭게 착륙하는 비행이다. 그렇다 보니 승무원들도 정신이 없다. 서비스는 해야 하지 비행기는 흔들리지, 게다가 착륙을 알리는 기장님의 방송은 오늘따라 빠르기만 하다. 이런 짧은 비행은 보통 하루에 몇 편씩 몰아서 하기 마련인지라 승무원들은 반복되는 이착륙에 지금 내린 공항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가 된다.
실제로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을 하다가 엉뚱한 도시 이름을 언급해 손님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해프닝이 가끔 일어나곤 한다. 혹시 그런 기내 방송을 듣게 되신다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라. 어떤 영화에서 첫 키스만 50번째라고 하던데 우리는 착륙만 500번째라서 그런다. 이런 비행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딱 한 가지, 하늘에서는 정신줄을 바짝 붙잡고, 지상에 내려오면 전투적으로 빵을 입에 욱여넣는 것이다.
비행시간 6시간~10시간을 자랑하는 장거리 비행.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소화하는 스케줄이자 딱 적당한 노동 시간으로 일할 맛 나는 비행이다. 일이 바빠졌다 여유로워졌다를 반복하기 때문에 중간에 짬짬이 쉴 틈도 있고 커피 한 잔 마시며 동료들과 회사 가십을 나눌 여유도 있다. 게다가 비행이 끝나고 나면 보통 낯선 도시에서의 1박이 기다리고 있게 마련. 뭘 먹을지 뭘 보러 갈지 동료 승무원들에게 조언을 구하다 보면 몇 시간이 금방 날아간다.
마지막으로 가시 달린 꽃, 비행의 최강자 초장거리 비행이 있다. 비행시간 11시간 이상을 자랑하는 이 무시무시한 녀석은 수다를 아무리 떨어도 심지어 잠을 자고 돌아와도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귀경길 교통 체증을 견디면 맛난 송편이 기다리고 있듯 이 잔인한 비행에도 나름의 묘미는 있다. 손님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초장거리 비행을 가는 항공기에는 승무원들의 휴식 공간인 벙커가 마련되어 있다. 객실 지하 혹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비밀의 계단을 통과하면 나오는 이 곳은 승무원들이 단연코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다. 혹시라도 배가 고파서 잠이 깰까 든든히 밥을 먹고 지정된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면 벙커행 출근이 완료된다.
골라먹는 아이스크림처럼 다양한 비행. 그렇다면 승무원들이 가장 선호하는 비행과 가장 멀리하고픈 비행은 각각 무엇일까. 답은 바로 ‘그런 거 없다.’이다. 더 정확히는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신조어 케바케, 사바사가 적당할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한번에 일을 몰아서 하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라 초장거리 비행을 선호한다. 기껏 공들여 올린 머리며 열심히 한 화장이 아까워서라도 길게 일하고 말겠다는 일종의 일시불 같은 스타일이다. 반면 초장거리는 죽어도 싫다던 한 사무장의 절규에 가까운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난 초장거리는 안 해.”
“안 한다고?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스케줄 나오면 하는 거지.”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난 절대 못 해. 스케줄 조정만 할 수 있다면 빌고, 바꾸고, 울고, 사기 치고, 뺏고 뭐든 다 해.”
정말 한참을 웃었다. 물론 조금 과장을 보태 한 말이긴 하지만 그 절박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초장거리 비행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요하는 비행이다. 게다가 한 번 다녀오고 나면 엉망이 된 신체리듬을 추스르는데 며칠이 걸린다. 때문에 초장거리 비행은 한 해 한 해 갈수록 승무원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반면 이런 승무원들도 있다.
“비행시간은 관계없어. 그냥 유럽이기만 하면 돼.”
유럽 대륙은 어딜 가나 비슷한 느낌이 있고 구할 수 있는 식재료도 비슷하다. 어디든 좋으니 고향 느낌이 조금이라도 나면 그걸로 만족이라는 거다.
그리고 만고불변의 진리.
“난 집에 좀 가고 싶어!!”
초장거리든 초초장거리든 뭐든 다 상관없으니 집에만 좀 보내달라는 승무원들이다. 다양한 국적의 승무원들이 울부짖는 말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말은 한국인 승무원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애국심과 자부심이 차오르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는 한국이 외국 승무원들에게 너무 인기가 많은 취항지이기 때문이다. 승무원들은 회사 내부 시스템을 통해 원하는 스케줄을 신청할 수 있다. 물론 백 퍼센트 반영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확률적으로 원하는 비행 한두 개 정도는 건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인은 한국에 가고 싶다. 그러니 한국 비행을 신청한다. 그럼 외국인들은? 요상하게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외국인 승무원들도 한국에 가고 싶어 한다. 그러니 집에 가고 싶다는 한국 승무원들의 소박한 꿈은 매번 잔혹한 확률 싸움 앞에서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코리안 바비큐 사랑하는 것도 알겠고 K화장품에 푹 빠진 것도 알겠는데 제발 자제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그리고 아주 소소한 두 번째 요인. 우리나라는 땅덩어리가 작다. 만약 중국 출신 승무원이 베이징을 간다고 하자. 그녀의 집은 베이징에서 비행기 타고 다섯 시간은 족히 걸린다. 그런 그녀가 베이징에 간다 한들 큰 의미가 있을까? 물론 고향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만족스러운 시간이기는 하겠지만 반드시 가고 싶은 비행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든 정말 가깝다. 인천 공항에서 바로 지방행 버스를 타면 먼 곳에 사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나라 승무원들은 더더 기를 쓰고 한국 비행에 목을 매는 것이다.
아무리 비행을 많이 했어도 아직도 못 가본 취항지가 있다. 또 아무리 많은 동료들을 만났어도 출근을 하면 또 처음 보는 얼굴이 있다. 몇 년째 하고 있는 일이지만 매 비행이 다르고 새롭다. 3시간짜리 비행이라고 다 같지 않고 어제의 파리 비행과 오늘의 파리 비행이 또 다르다.
그래서일까.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인 외항사 승무원들은 1년 뒤에 그만둔다 하다가 또 1년 뒤, 또 또 1년 뒤로 자꾸만 비행과의 이별을 미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