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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쟌 Oct 31. 2020

멀리서 들려오는 여왕의 소식.

다만 믿어주시라.


 기껏해야 가공해서 버터로 만들어지는 게 전부인 줄 알았더니 땅콩이라는 녀석은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식품이었다. 비행기 앞머리까지 돌려버린 땅콩 파워를 계기로 오너 일가의 갑질이 대한민국을 너머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덕분에 필자는 한동안 외국 출신 동료들에게 땅콩 하나 때문에 비행기를 돌린 게 사실이냐는 질문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때마다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여야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백성들로 하여금 누가 왕으로 있는지도 모르게 하는 왕이 가장 훌륭한 통치자라고 하던데 땅콩 여왕님의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안타깝게도 훌륭한 왕이 되기는 이미 그른 것 같다.      


 구중궁궐에 앉아계신 오너 일가는 아니지만 필자도 비행기 안에서 회사 주요 관리자를 손님으로 만난 적이 있다. 로마로 향하는 비행기 안. 비행 출발 전부터 소란스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공기 중에 스며든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니 서비스 관리 총책임자가 손님으로 탑승한다는 것이었다. 본사 꼭대기 층에나 있을 법한, 사내 신문에서나 보았을 법한 인물. 평소 만날 일 없는 관리자의 탑승에 등줄기가 꼿꼿이 서는 느낌이었다.    

 

 온화한 인상의 50대 여성 관리자는 필자가 서비스를 담당하는 구역에 앉았다. 첫인상이 반이라고 나는 최대한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물론 자기소개를 하는 목소리가 살짝 떨린 것은 비밀이다.      


 비행이 시작되고 우리의 조금 특별한 손님은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그리곤 마치 소설 속 한 문장처럼 그 후 아무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 비행이 끝날 때까지 자리가 텅 비어있자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필자는 사무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 손님 어디 계셔?” 
 “이코노미 클래스 승무원들이랑 얘기 나누는 중일걸? 그 사람 비행기 타면 원래 그래.”     


 알고 보니 이 관리자는 비행기만 탔다 하면 기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수다도 떨고 회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또 서비스 개선 사항에 대한 피드백도 듣는다고. 필자는 속으로 작게 놀랐다. 땅콩을 왜 이모양으로 서비스하냐 호통을 쳐도 모자랄 판에 민초들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비행기 안을 돌아다닌 다니. 역시 평소 그녀에 대해 별다른 소문을 듣지 못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오너 일가의 귀하신 상무님이나 오피스 안 고위 책임자. 어쩌다 한번 만나는 이들은 직원들을 내심 긴장하게 만드는 회사의 중역이다. 하지만 이들 말고도 우리 일상은 다양한 관리자와의 만남으로 채워져 있다. 현장에서 매일매일 마주하는 중간 관리자들. 이들은 팀원을 이끌어 주는 업무를 맡고 있는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그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사무장, 부사무장이라 불린다.     




 한 번은 동료 사무장이 이렇게 물었다.     


 “좋은 사무장이란 어떤 사무장인 것 같아?”


 더 나은 동료, 그리고 관리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숙고하는 그녀의 태도는 너무 훌륭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그녀의 미간에 서려있던 진지함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또 반대로 팀원을 믿지 못하고 끝없이 추궁하는 사람도 있다.     


 “이거 했어? 저건 했어?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혹시 잊었을까 걱정해 주는 게 아니다. 매 순간 동료가 제 몫의 일을 끝내기도 전에 채근하고 의심한다. 마치 네가 하는 일은 미덥지 못하다는 듯이. 그럴 때마다 리더를 향한 팀원들의 신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좋은 관리자, 좋은 리더, 혹은 좋은 재벌가 영애가 되기 위해 수업을 듣거나 책을 사서 읽을 필요는 없다. 다만 내 옆을 지키고 있는 이들이 본인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전심으로 믿어주면 된다. 그들은 같은 자리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 할 일을 해왔던 사람들이다. 땅콩을 포장지째 주던 까서 주던 그들이 노동의 현장에서 묵묵히 뿌린 땀을 믿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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