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쟌 Mar 20. 2020

등받이 전쟁


 여행을 앞둔 당신은 수많은 가격 비교 사이트를 비교 분석 해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손에 넣었다. 이제 울컥 올라오는 귀찮음을 삼키고 항공사 앱을 설치할 차례이다. 무엇에 동의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의함’을 열댓 번쯤 누르면 이제 드디어 예약 완료라는 자랑스러운 페이지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 모든 난관을 헤치고 공항에 도착한 여행객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보딩패스라는 이름의 얇아빠진 종이 한 장뿐. 이 별거 아닌 종이 한 장 값을 앞으로 세 달 동안 나눠 낼 생각을 하니 당신은 벌써부터 속이 쓰려온다. 

 적게는 몇 십만 원에서 크게는 몇 천만 원까지 하는 이 종이.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무엇을 위해 그리 큰 금액을 지불했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너는 대관절 정체가 무엇이냐!?"



 ‘저는 유류세, 공항 이용료, 항공기 이용료, 인건비, 기내 식사에 대한 값을 치른 거예요.’     



 물론 옳으신 말씀이다. 비행기를 타자니 공항도 있어야겠고 긴 시간 지루하지 않게 밥도 먹어야겠고, 비행시간은 짧은데 돈을 낼 항목은 구구절절 많기도 하다.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수많은 승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 승무원들에게 그 금액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우리는 조금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건 내 공간을 갖기 위해 내는 돈이에요.’     



 비행기라는 공간은 천천히 둘러보면 정말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좁은 공간이다. 성인 한 명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에 좌석들이 벌집처럼 얼기설기 엮여 있으며 좁은 화장실 안에서 양치질 조차 편하게 할 수 없다. 


 항공사에게 있어 공간은 곧 이익이다. 한번 띄우는데 천문학적인 금액이 드는 항공업의 특성상, 하나라도 많은 좌석을 만드는 것이 항공사의 생존전략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승객들은 조금이라도 더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몸싸움, 머리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대화는 공항 발권 카운터에서 흔히 들리는 머리싸움의 대표적인 행태이다.     

 

 결전의 순간 체크인

 


 ‘앞좌석 넓은 자리 없어요? 다리를 다쳐서......’


 ‘저는 가운데 끼어가면 답답해서 숨을 못 쉬겠어요.’     

 


이와 같은 승객들의 요구 사항에 대부분의 항공사 직원들은 복사, 붙여 넣기라도 한 듯 동일한 답변을 내놓는다.     

 ‘좌석을 선택하시는 것은 유료입니다.’     


 비행기를 타는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이 말. 유료. 이래도 유료 저래도 유료. 무언가 조금이라도 더 좋은 것을 선택하려 하는 순간 따라오는 말이다. 조만간 비행기 안에서 숨 쉬는 것조차 유료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다. 


 승객들의 눈치 작전과 이에 대항하는 항공사의 부분 유료화 정책. 이 치열한 창과 방패의 싸움 속에서 어떤 날은 승객이 또 어떤 날은 항공사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한다.     



 그렇다면 비행기 안에서는 벌어지는 몸싸움은 어떨까? 최근 미국에서 앞, 뒤로 앉은 이코노미 클래스 승객들이 등받이 문제로 싸움을 벌이다 결국 sns에 이를 포스팅 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사례가 있었다. 


 "좌석 간격이 왜 이렇게 좁냐고 저한테 물으셔도......"



 앞 좌석 등받이가 내 앞으로 밀려오는 순간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것일까? 잠깐의 불편함? 양해를 구하지 않은 앞 승객에 대한 분노? 사실 이 순간 뒷좌석 승객이 느끼는 감정은 부당함에 가깝다.

 

 수많은 난관을 넘어 겨우 차지한 한 뼘짜리 내 공간 안으로 예고도 없이 불쑥 들어오는 ‘앞좌석’이라는 이름의 침입자. 온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공간을 타인과 강제적으로 공유하게 되는 순간 뒷좌석 승객은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간이 상대적으로 넓은 비즈니스와 퍼스트 클래스는 앞뒤 등받이 문제로 싸울 일이 없으니 평화로운 세상일까? 그럴 수만 있다면 승무원들도 비행 내내 웃으며 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공간에 대한 싸움은 공간이 넓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잠을 자고 싶은데 밥을 먹는 옆 좌석 승객이 냄새로 내 공간을 침범하기도 하고, 멀리 떨어진 좌석에서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이 덕분에 내 공간이 산산조각 나기도 한다. 아무리 넓은 공간이라 한들 한계는 있기 마련. 결국 공유하는 법을 익히는 것만이 평온하게 비행을 마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오늘은 비즈니스 클래스에서 호사 좀 누려 볼까나?"


 비행기라는 좁은 공간 속 우리는 한 뼘이라도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건 아마 타인과 접촉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면서도 내 공간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이라는 동물의 이기적인 특성에서 기인하는 바가 클 것이다. 


 그리고 그 바람에 등이 터지는 건 필자와 같은 유니폼을 입은 새우, 즉 승무원들이다. 승무원은 승객들이 싸우기 시작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선생님 혹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동생과 싸우는데 부모님께서 일방적으로 동생만 감싸고돈다면 어떻겠는가? 동생보다 더 미운 사람이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런 곤란한 상황 속에서 승무원들은 마법같이 공평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만약 좌석을 반으로 쪼개기 직전 누가 더 가슴 아파하며 먼저 포기하는지 지켜볼 수만 있다면 사태를 조금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런 기내 방송을 읊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승객 여러분, 지금 급히 조정해야 할 기내 분쟁 사항이 발생하였습니다. 승객 여러분들 중에 판사님이 계시다면 지금 저희 승무원에게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가지 방법 모두 마음속으로 조용히 시도해 볼 뿐 현실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좁은 비행기 안에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여행하고 싶은 마음, 승무원들이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화를 내기 전 잊고 있었던 사실 한 가지를 다시 떠올려보면 어떨까. 내가 앉아 있는 이 비행기라는 공간은 맨 앞 기장실에서 이코노미 맨 끝 자리까지 걸어서 삼분도 채 걸리지 않는 협소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또한 옆자리에 앉은 이 사람과 나는 좋든 싫든 남은 비행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운명공동체이자 이웃이라는 것을. 세기의 명작인 성경에도 쓰여 있지 않은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전 02화 3만 5천 피트 상공에서 지켜본 인생의 모든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