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학창 시절 열심히 외운 게 아까워 공감각까지 억지로 욱여넣어 육감으로 산다고 할까 싶지만, 일단 우리 인간은 오감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온몸을 둘러싼 감각 기관은 언제나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를 바쁘게 처리한다. 그 감각의 주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오늘 필자는 이 ‘원하지 않든’에 주목해보자 한다. 이해해주시라. 아주 조금 삐딱한 인간이라서 그렇다.
여기 할머니를 모시고 처음 해외여행을 나서는 손녀딸이 있다. 들뜬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라타기도 잠시,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다.
좁은 공간 속. 옆 좌석에 앉은 승객이 어쩐지 계속 부산스럽다.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 가방을 열었다 닫았다. 운동선수도 아닌데 쓸데없이 넓은 제 주변 시야가 원망스럽다.
어디 수학여행이라도 가는 건가. 내가 어릴 때 이런 호화로운 단체 여행은 꿈도 못 꿨는데...... 좋게 말해 재잘재잘 솔직히 말해 와악와악.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이 얼마였더라?
난기류도 없이 고요하게 날고 있는 비행기 안에서 어쩐지 속이 울렁거린다. 도대체 이 향수 냄새는 어디서 날아오는 것인지. 냄새 분자를 공기 중에서 분해하는 기술 도입이 시급하다.
오늘도 내 바로 앞에서 떨어진 치킨. 치킨을 상상하며 생선을 씹으면 치킨 맛이 날까? 천장에 매달린 굴비의 미학을 되새기며 기내식을 먹어야 할지, 승무원을 불러다 따져야 할지 고민해 본다.
모든 감각이 요동치는 가운데, 그녀는 인간의 진화 과정에 불만을 품기 시작한다.
“진화를 하는 김에 조금만 더 하지. 온오프 스위치가 있으면 얼마나 좋아.”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두 가지 정도밖에 없다.
조용히 영혼을 오프 시키거나 21세기의 영혼, 인터넷을 켜거나.
그녀는 주저 없이 후자를 택했다.
그리곤 글자를 총알 삼아 세상을 향해 무작위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다. 그녀가 쏘아 올린 총알은 사방으로 날아갔고, 그중 몇 개는 사회적 규범이라는 큰 벽에 날아가 박혔다.
이미 박혀 있던 총알이 많았던 탓일까? 커다란 벽은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며 둘로 갈라졌다.
이제 세상에는 원래 있던 벽인 ‘규범’과 거기서 떨어져 나온 ‘규범-1’이라는 작은 벽이 생겨났다. 이 현상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우리의 삶이 더 촘촘하게 불편해진다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생겨난 규범-1이 소리도 없이 우리의 일상을 파고든다.
“야, 요즘엔 이러면 안 돼.”라는 친구의 타박과 함께.
‘요즘엔 이러면 안 돼’는 게 많은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그건 ‘2020년 버전’ 엘리베이터 타는 법, ‘2020년 버전’ 길 걷는 법 따위를 매일같이 업데이트하며 살아가는 세상일 것이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처럼.
sns? 개인주의? 아니면 핵가족화? 시계를 얼마나 뒤로 돌려야 이 모든 현상의 시작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핑핑 도는 시곗바늘에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기왕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거 조금 멀리,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어느 날까지 가 보면 어떨까.
머리를 싸맨 2020년의 필자를 위해 중국의 한 훌륭한 어르신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그 날로.
덕(德)이 없으면 인(仁)이 강조되고,
인(仁)이 없으면 의(義)가 강조되고,
의(義)도 없으면 예(禮)가 강조된다.
걱정 마시라. 필자도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이 훌륭한 어르신 a.k.a 노자 선생님께서는 아마도 다분히 래퍼의 기질을 가지고 계셨나 보다. 라임이 훌륭하다는 것은 잘 알겠다.
요즘 세상에 맞게 번역하자면 선생님의 말씀은 대충 이런 요점을 가지고 있다.
할머니 왈, “우리 옛날에는 cctv 그런 거 없었어.”
손녀 왈, “그럼 누가 가게에서 물건 집어가면 어떻게 해요?”
다시 할머니 왈, “옛날에는 그런 거 없어도 아무도 안 가져갔지.”
궁금증 많은 손녀 왈, “정말 아무도 안 훔쳤어요?”
참을성 많은 할머니 왈, “애들이나 그랬지. 그럼 데려다 잘 타일러서 보냈고.”
말 많은 손녀 다시 왈, “타일러서 보내요? 요즘엔 혼내도 소용없는데.”
갑분 노자 왈, “그러니까 예가 중시되는 것 아니겠느냐.
예절은 결국 사람 사이의 규칙이란다.”
인과관계는 이렇다.
여기 도덕(德)을 잃고 물건을 훔친 한 아이가 있다.
할머니는 아이 내면의 어진 마음(仁)을 일깨워 다시는 훔치지 않게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하지만 어진 마음을 잃은 아이가 또 남의 것을 탐했다.
그러자 이번엔 손녀딸이 나타나 조금 더 강하게 아이를 혼냈다. 도둑질은 정의롭지(義) 못한 일이라며.
하지만 정의로운 마음을 깨닫지 못한 아이가 다시 물건을 훔쳤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마을 사람들은 예의범절(禮)과 규칙으로 아이의 손과 발을 꽁꽁 묶어버렸다.
익숙하지 않은가? 이 아이는 바로 오늘날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도덕을 잃은 사회에서 오직 예(禮)를 통해 서로를 단속하는 우리들 말이다.
하지만 오해는 마시라. 노자 선생님께서 예절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발현되어 외부로 뻗어나가는 도덕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할 뿐이다.
자, 그럼 이제 오감을 너무 훌륭하게 만족시켜 주어 큰일이었던 비행기 안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흔들리는 좁은 공간 속, 타인과의 거리가 0으로 수렴하는 이곳.
당신은 빛나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욕구의 충족도 욕망의 추구도.
훌륭하신 래퍼 선생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품은 지금, 당신은 내면의 도덕을 따라 행동하겠는가 아니며 외적 예절이 나를 제한하기를 기다리겠는가.
어느 쪽이든 좋다.
하지만 이것 한 가지만 기억해 주시길 바란다.
예절이 나를 속박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면, 당신은 아마 굉장히 높은 확률로 매섭게 눈을 치켜뜬 ‘예절 전달자’ 승무원을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