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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쟌 Oct 31. 2020

잃어버린 캐릭터를 찾아서.

챙길 건 챙기자.

네 캐릭터를 살려!
 

 필자가 서비스 교육을 받던 도중 회사 트레이너에게 들었던 말이다. 애니메이션 산업도 아니고 영화 촬영장도 아닌데 캐릭터가 웬 말인가. 이야기의 시작은 트레이닝 시작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자는 비즈니스 클래스 근무를 앞두고 일주일간 새로운 서비스를 배우게 되었다.   

   

 교육 지속되는 동안 필자는 있는 듯 없는 듯, 교실 뒷배경과 물아일체를 이룬 얌전한 학생이 되었다. 한국의 학교 혹은 회사 교육장이라면 칭찬받아 마땅한 수업 태도. 하지만 함께 수업을 듣는 동료 승무원들은 교육장이 아니라 해리포터 촬영장으로 갔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개성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틈만 나면 유머를 던져 수업시간을 까먹는 천재가 있는가 하면 아주 작은 것 하나까지 꼬치꼬치 캐물으며 파고드는 헤르미온느도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건 영 불편한 순도 백 프로 숙맥 학생이었다. 모름지기 말하는 건 선생님이요 듣는 건 학생이다. 목소리를 내면 거품이 되어 사라질지도 모르고 발표를 하면 모두의 시선을 받고 돌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필자는 그렇게 마지막 날까지 자신을 드러내는 일 한 번 없이 교육을 끝마쳤다. 

     

 마지막 수업이 끝난 후. 트레이너는 모두에게 격려와 조언을 하며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리고 내 앞에 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너를 좀 더 보여줘. 네 캐릭터를 비행에서 살려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캐릭터라니. 우리는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스타일로 머리를 묶는다. 심지어 사용해야 하는 단어도,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말도 정해져 있다. 통일성을 위해 만들어진 규정집을 읽다 지쳐 잠이 든 게 어젯밤 일인데 내 캐릭터를 살리라니. 그런 건 승무원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가시가 되어 목에 확 걸렸다. 그리고 비행을 할 때마다 여린 목 근육을 쿡쿡 찔러댔다. 캐릭터, 즉 개성이라는 멋진 말. 비행에서 개성을 살려 일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애초에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일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오랫동안 비행을 했지만 이런 고민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질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고 질문 또한 던져졌다. 다행히 호기심 많은 성격의 필자는 매 비행마다 이 질문을 소일거리 삼아 열심히 답을 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그렇듯 이런 말을 들었다.


 “아까 맥주 주문한 거요…. 아까 그분 맞으시죠?”    

 아닙니다. ‘저는 아까 그분이 아닙니다’라고 머리 위에 써서 붙이고 다녀야 할까. 우리는 비행 중 늘 ‘아까 그분’으로 착각을 당한다. 비행기 안이 어두워서 손님들이 잘 못 알아보는 걸까? 그럴 리 없다. 손님들 시력이 문제가 아니라 승무원들이 통일성을 잘 지킨 결과이다.     


 항공사라는 큰 회사를 받치고 있는 많은 기둥 중 이미지는 가장 크고 단단한 기둥 중의 하나이다. 정시 출발,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저렴한, 친절한 등등. 항공사의 이름을 듣는 순간 당신의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 지나간 그림. 그게 바로 항공사가 수년간 피땀 흘려 노력해 만들어낸 통일된 ‘이미지’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뭐니 뭐니 해도 승무원들이다. ‘아까 그분 맞으시죠?’라는 말은 그런 깊은 배경을 바탕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일일이 설명하는 게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필자는 이 말을 듣는 게 싫지만은 않다. 든든한 아군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작은 잔가지일 뿐인 내가 커다랗고 단단한 뿌리를 끌어안고 있는 느낌, 그런 안정감이 든다.     

 

 통일성과 개성. 이 두 가지는 반비례의 관계에 놓여있다. 하나가 올라가면 나머지 하나는 필연적으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필자는 그간 통일성에 올인하는 승무원이었다. 짜장면 통일, 짬뽕 통일, 승무원도 통일.      


 하지만 비행 중 동료들을 관찰하면 관찰할수록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바로 미묘하게 다른 스타일이다. 개그맨 시험에 떨어지고 승무원을 하고 있는 건지 손님을 웃기는데 필사적인 동료가 있다. 또 전직 호텔리어 출신인 한 승무원은 전생에 백조였는지 걸음걸음마다 우아함이 배어있다. 정 많은 할머니처럼 계속 손님들에게 먹을 걸 권하는 동료도 보았다. 모두들 저마다의 개성으로 비행을 물들이고 있었다. 딱딱하게 정해진 대사만 읊는 필자만 제외하고.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통일성은 중요하다. 회사의 근간이 되는 매뉴얼 위를 멋대로 행진하면 손님들은 회사를 신용할 수 없다. 누르고 싶은 건반을 마음대로 누르면 훌륭한 협주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작은 변주라면, 악보 사이사이를 촘촘히 채우는 변주라면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이제 비행 가기 전 체크 리스트가 하나 더 늘어버렸다. 핸드폰, 여권, 지갑, 매뉴얼 그리고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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