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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쟌 Oct 31. 2020

몸무게가 느는 진짜 이유.

지구인 성장기.


 

 190여 개 국가가 가입된 초국적 단체 UN. 필자는 190개까지는 아니지만 꽤나 다양한 국적의 직원으로 구성된 항공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대부분의 항공사는 언어 통역이라는 실질적인 이유와 국제적 이미지 구축을 위해 전 세계를 돌며 승무원을 모집한다. 때문에 승무원들이 입국  심사대 앞에 서면 총천연색 여권의 무지개가 만들어지곤 한다.    

 


 입국 심사만 끝나면 다시 가방 안으로 들어가게 마련인 여권. 하지만 알록달록 색의 물결이 사라져도 동료들이 뿜어내는 저마다의 색은 사라지지 않는다. 공기 중을 가득 채운 저마다의 색인 문화는 우리가 함께하는 매 순간을 다름으로 채운다. 흥미진진한 새로움의 연속이자 골치 아픈 갈등의 시작, 다름. 필자는 물이 반밖에 안 남았네를 지지하는 사람이므로 골치 아픈 경우부터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사람은 소통을 하는 존재이다. 소통은 언어를 통하며 언어가 정교할수록 머릿속에 그려낸 것을 상대방의 머릿속에 정확히 주입할 수 있다. 하지만 언어가 아무리 정교하다 한들 내가 말한 것이 상대방의 문화권에서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저기 주황색 펜 좀 집어 줘.”     


 펜 하나 집어 달라는 간단한 부탁. 형형색색의 펜이 놓여있는 가운데 한국인이라면 정확히 주황색 펜을 전해준다. 또 아주 높은 확률로 중국인이나 일본일들도 같은 색 펜을 집어줄 것이다. 하지만 세계를 조금 확장시켜 태국, 필리핀 사람에게 같은 부탁을 한다면? 아마 노란색 혹은 붉은색을 집어줄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그나마 양반이다. 공유하고 있는 배경이 털끗만큼도 없는 쏘냐 혹은 모하메드에게 같은 부탁을 한다면…. 기대해도 좋다. 파란색을 집어줄 테니까.     


 인터넷으로 세상이 하나가 된 지 오래이고 유학이나 해외여행의 기회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하지만 나이테처럼 내 안에 한 줄 한 줄 깊은 흔적을 남기는 게 바로 문화이다. 유튜브를 아무리 오래 본다한들 유학 가서 현지 친구를 사귄다 한들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이테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다문화 기업에서는 본격적으로 업무에 들어가기에 앞서 재미난 합의를 진행하곤 한다.      


 “자, 주황색 펜을 집기 전에 우리 주황색이 뭔지 먼저 정의를 내리고 시작하자.”     


 너의 주황색과 내 주황색이 다른 이곳에서만 일어나는 재미있으면서 황당한 일이다.

      

 귀찮기만 한 협의의 과정. 볼펜 하나 정도 쿨하게 다른 색을 쓰면 되지 뭘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비행을 하다 보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안전 업무, 손님 응대, 팀 내 소통 등등.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정말 이를 악물고 커다란 지구를 작은 비행기 안에 담아내야 한다. 끝없이 부딪히고 또 부딪혀 배우는 점을 익히고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국인에서 지구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 다문화 기업에서 지구인으로의 성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우리 민족의 특징에 대해 한 중국 버라이어티 방송에 출연한 패널이 이렇게 칭한 적이 있다.      


 “수업할 땐 엄청 조용하고 아무 반응도 없는데 막상 시험 보면 엄청 잘 봐요. 게다가 시험 끝나면 놀기도 엄청 잘 놀아요.”     


 우리 민족을 아주 잘 파악한 한마디라 생각된다. 그런 민족성이 있어서일까. 한국 승무원들은 비행 중에도 일은 일이다. 일에 여유를 섞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빠르게 해치우는 것을 좋아한다. 거칠 것 없이 필드를 누비는 공격수 같다. 하지만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 출신 승무원들은 일하다 말고 손님과 농담 따먹기도 좀 하고 동료 승무원들에게 물을 한 잔 권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필자에게 하는 말.     


 Relax. easy, easy.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하라는 말이다. 빨리빨리 DNA가 내장된 우리 입장에서는 참 기도 차지 않을 이 말. 마음 같아선 ‘easy고 뭐고 하던 거나 마저 해!’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국가의 위상에 먹칠을 할 수는 없으니 조용히 속으로 삼킨다.      


 그의 눈에는 동동거리는 필자의 모습이 뭍에 올라와 팔딱거리는 생선처럼 보였던 게 분명하다. 사실 손을 조금 빨리 놀려봐야 절약되는 건 고작 몇 분이다. 게다가 승무원이 빨리빨리 일한다고 해서 비행기가 빨리 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 말리고 싶어 지는 마음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빨리빨리도 나름의 미학은 있다. 일을 빠르게 해치우면 앉아서 커피라도 한 잔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또 승무원이 조금 더 동동거리면 손님은 그만큼 더 편안하게 비행을 즐길 수 있다.     


 늘 그렇듯. 그대의 말도 내 말도 모두 옳다.  

    

 한국 항공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손발이 척척 맞는 불도저가 따로 없다. 여러 명이서 일 하는데도 어쩜 그렇게 한 몸 같은지 놀라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손 끝까지 딱딱 맞는 무대 위의 아이돌 같은 모습. 이는 아마 하나의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동일한 목적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수준 높은 K팝을 관람한 후 필자는 다시 온갖 개성이 넘치고 날뛰는 다문화 기업의 비행기로 돌아온다. 수십 개의 문화를 끌어안고 하늘을 나는 이 공간에서 필자는 오늘도 나를 깎아내고 그 자리에 너를 집어넣는다. 직급이 높다는 이유로 혹은 우리 문화가 더 우월하다는 식의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내 방식만 고집한다면 그 사람은 얼마 못가 팀에서 고립되고 말 것이다.     


 내 방식과 네 방식이 충돌하는 매일. 부딪힌 데가 아프고 쓰려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방식은 내게 옳은 방식일 뿐 너에게도 옳은 방식이 아니다. 그러니 필자는 오늘도 나를 너로 채운다. 그래서일까. 체중계 위의 숫자가 또 조금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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