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쟌 Oct 31. 2020

컴플레인과 소설 사이.

소설은 정중히 사양합니다.

 

 자소설이라는 말이 있다. 하도 부풀리고 부풀려져 소설처럼 지어낸 자기소개서라는 뜻이다. 오죽 취업 시장이 팍팍하면 이런 말까지 생겼나 싶어 씁쓸해지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 같은 신조어인데 놀랍게도 승무원들 역시 가끔 이런 황당한 소설을 받아 보곤 한다.     


 그 소설의 정체는 바로 부당한 대우에 대한 항변, 컴플레인 레터이다. 불만 사항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소비자로서의 당연한 권리이다. 하지만 있었던 일 그 이상을 창작하는 건 어떨까. 어떤 손님들은 비행기에서의 일화를 마치 대하 무협 소설처럼 풀어놓곤 한다. 우선 승무원이라는 등장인물 앞에 다채로운 묘사가 따라붙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지나치게 한가로운’, 혹은 ‘불친절하고 무성의한’ 등등. 그리고 내용이 진행됨에 따라 섬세한 감정 묘사와 극적인 사건 전개가 아주 일품이다. 옛말에 사람 몇 명만 모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 낸다던데 요즘 세상엔 불만족 고객 몇 명만 모이면 승무원 한 명이 회사에서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다.      


 승무원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면 이를 지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내 불만의 근원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보내는 불만 레터가 많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이불속 귀신보다 무서운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치과 의사 선생님이 아니었을까? 선생님이 아무리 상냥하게 웃고 진료실에 시대를 주름잡는 뽀로로, 펭수 기타 등등의 캐릭터 인형을 준비해 놓아도 우리는 선생님만 보면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떠나 치료 행위 자체가 무섭고 아팠기 때문이다. 비행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친절하게 웃으며 말한다 한들 내가 졸려 죽겠는 안전벨트를 매라며 나를 깨우는 사람이 곱게 보일 리 없다. 또 비싼 값을 내고 비행기에 탔는데 와이 파이는 유료 구매라는 소리를 들으면 짜증이 치민다.     




 비행을 하다 보면 단호한 얼굴로 손님의 행동에 제제를 가하거나 죄송스러운 얼굴로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사탕은 쥐어주지 못할망정 윙윙거리는 살벌한 치아 삭제기를 들이대는 승무원들. 비행 중에도 그리고 비행이 끝난 뒤에도 좋은 소리를 듣기는 애초에 글렀다.     


 물론 그럴 때마다 승무원들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스스로를 보호한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날아오는 손님의 표창 앞에 ‘을’은 할 수 있는 게 그다지 많지 않다.     


 ‘좋은 승무원’은 내게 좋은 것을 주는 사람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승무원을 어여쁘게 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내 입에 당근을 넣겠다고 도깨비 같은 얼굴로 쫓아오는 엄마야 말로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사람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 그 이면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 가지는 참 의미를 볼 수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제대로’된 감사나 분노, 그 어떤 것도 세상에 내놓을 수 없다.     


 필자의 바람은 단 한 가지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정말 나를 실망시킨 대상이 무엇인지를 천천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표창은 그 뒤에 던져도 늦지 않다.     

이전 09화 일본형, 유럽형. 한국형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