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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쟌 Oct 31. 2020

일본형, 유럽형. 한국형은?

토끼의 후예들이여, 들고 일어나라.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너. 


인생의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는 말이라서 그런지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이 노래에 열광했다. 사실 내 것 같지만 내 것 아닌 게 어디 한둘일까. 애인의 마음부터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야속한 월급까지. 잘 생각해보면 정말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다.   

  

 “나도 아침에 출근할 때 간이랑 쓸개 꺼내서 냉장고에 넣고 나와.”     


 슬프다 못해 무서운 말이다. 많은 직장인들의 가슴을 울린 ‘김 과장’의 명대사에 따르면 오장육부조차 내 것이 아니다. 내 속에 어엿하게 자리 잡고 있은 지 오래인 자존심, 자존감. 이런 것들 조차 출근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치라는 소리다.      


 직접 들여다본 적이 없는지라 김 과장의 사무실에 간 없는 사람이 몇 명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길거리 떡볶이 가게부터 대형 영화관까지, ‘손님은 왕’이라 칭하며 소비자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어준 우리나라의 서비스 업계라면 어디서든 ‘토끼의 후예’들을 만날 수 있다.      


 일단 묻게 된다. 우리는 왜 이런 세상을 당연시 여기게 되었는지. 답은 당연히 우리가 함께 쌓아 올린 시간 속에 있다. ‘손님은 무조건 옳다’며 잘못된 소비문화를 자리 잡게 한 기업, 견디는 것이 미덕이라며 아파도 참은 직원들.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그 결과 손님을 직접 만나며 최전방에서 일하는 서비스직 종사자들은 멍든 가슴과 상처 입은 영혼을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냉장고를 연다. 행여 보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 숨을 죽인 채. 늦은 밤, 다시 꺼낸 인간의 존엄은 차갑기만 하다.      


 서비스직 종사자들은 마치 무기 하나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과 같다. 손님이 어떤 행동을 하건 공격도 방어도 하지 못한다. ‘안 된다.’, ‘못 한다.’ 소리는 꿈도 못 꾸는 이들은 그 자리에 서서 고스란히 수모를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무방비함 때문일까.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직원을 지키기 위한 작은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씨는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입니다.’

‘손님은 왕이 아닙니다.’

‘승무원의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모욕적인 언사를 할 경우 항공법에 의거하여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직원의 명찰에 써 붙여진 문구, 가게 전면에 적힌 안내문.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까지. 우리는 무기가 없으니 손님께서 스스로 변해주시라 호소하는 간절한 목소리이다.     


 손님과 종업원의 관계. 수직적으로 보이는 이 관계는 과연 변할 수 있을까.     


 일본에서 지하철 카드를 살 때의 일이다. 당시 두 가지 카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으나 필자는 어느 쪽이든 별로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설명을 일일이 듣기도 귀찮았던지라 그냥 ‘아무거나 주세요’라는 쉬운 선택을 했다. 그러자 돌아오는 역무원의 말.     


 “곤란합니다.”     


 예의 바른 태도. 그러나 짧고 간단한 거절이었다. 손님의 요구 사항에 최대한 맞춰주고자 하는 우리의 문화와 상당히 달랐다. 필자는 빠르게 사과를 하고 카드를 골랐다.     


 꼼꼼하고 친절한 태도로 서비스 강국이라 불리는 나라 일본. 그래서일까. 필자는 일본의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고강도의 정신적 고통을 감수하며 근무를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원칙 고수라는 나름의 보호막이 있었다.  

    

 서비스 제공자와 손님 사이에는 일종의 시퀀스, 즉 흐름이 형성되어 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하면 나는 이렇게 응대하고, 당신이 이런 표정을 지으면 나는 이렇게 웃습니다. 함께 탱고를 추는 것과 같은 이 시퀀스가 진행되는 동안 갑자기 스텝을 바꾸거나 혼자 너무 빨리 움직여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엇나가기 시작한다면 일본 서비스 업계는 단호하게 파트너의 손을 놓아버린다. 흐름에서 벗어나는 순간 당신은 아웃, 즉 계약 위반자가 될 뿐이다. 그리고 ‘손님, 곤란합니다. 규정에 위반됩니다.’ 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다면 유럽 사회는 어떨까. 그들도 언제나 원칙 고수 실드를 치며 직원의 멘탈 보호와 회사의 안녕을 도모할까.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들이 더 선호하는 방패막은 따로 있다. 그건 바로 일찍부터 발전한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꽃 피운 인권이다. 그들은 인권에 대한 다양하고 심도 깊은 논의를 마친 지 오래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비스업 종사자들은 나도 직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손님 앞에 내보인다. 거리낌 없이 아주 당당하게. 만약 그 존엄한 사실에 위배되는 행동을 할 시에는 손님은커녕 인간적인 대우도 안 해주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그래서 유럽 사회에서 손님과 서비스직 종사자 사이에서는 끊이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논리적 언쟁이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인격을 모독하는 발언, 있지도 않은 왕의 권력을 휘두를 수 없으니 이제 소비자는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조목조목 나열하며 제가 원하는 것을 쟁취해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가 잊지 못하는 한 손님이 있다. 대학교 때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한 미국인 손님이다. 그분은 이미 보고 나온 영화 티켓을 보여주며 같은 영화를 한 번 더 보러 들어가겠다고 했다. 세상에 이보다 황당한 요구 사항이 어디 있겠는가. 본 영화를 한 번 더 보게 해 달라니. 필자는 당연히 안 된다고 하였지만 이 손님은 거기서부터 셀프 변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주장은 이랬다.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영화 시작 부분을 놓쳤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표를 산 것이니 다음 회차 영화가 시작할 때 들어가서 앞에 못 본 5분만 보고 나오겠다. 어차피 다른 영화를 보러 들어가겠다는 것이 아니니 내 주장에는 하등 문제가 없다.    


 

영화 표는 이미 샀고 같은 영화이니 나는 볼 권리가 있다는 그의 말. 언뜻, 그것도 정말 아주 아주 언뜻 들으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손님이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가 산 것은 영화가 아니고 영화를 볼 수 있는 좌석에 할당되는 시간을 산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것은 주장이 아니라 궤변이었다.     


 콧대를 한껏 세우며 남의 나라에서 영어로 궤변을 펼치는 이 손님.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영화관이 아니라 한국에서 쫓아내고 싶었지만, 필자가 근무하는 영화관은 손님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지상 최대의 미션을 수행하는 중이었던지라 다음 회차 영화 앞부분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각 나라마다 고유의 문화와 역사가 녹아들어 저마다의 방식으로 손님과 직원 사이의 관계를 형성한다. 우리나라 서비스업의 경우 기울어진 시소와 같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손님은 권력의 정점에 직원은 끝도 보이지 않는 권력의 밑바닥에. 안타깝게도 시소는 결코 저절로 움직이지 않는다. 시소가 균형을 맞추려면 한쪽이 무게를 줄이거나 다른 한쪽이 무게를 늘리는 수밖에 없다. 기업이 손님 같지 않은 손님의 돈을 받지 않을 때, 직원들이 당당히 제 권리를 말할 수 있을 때 시소는 균형을 되찾는다. 언제까지 손님들에게 스스로 ‘좋은 손님’이 되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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