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물결이 파도가 되는 그날까지.
우리는 하나라는 아름다운 외침. 감자 튀김에 케쳡 대신 마요네즈를 찍어 먹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우리는 긴밀하게 연결된 삶을 사는 21세기 지구인이다. 그렇다면 지구본을 옮겨 놓은 작은 비행기 안. 우리는 정말 하나일까?
전세계로 취항하고 전세계에서 승무원을 모아 놓은 곳, 항공사. 다른 나라에서 온 우리는 저마다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있다. 모름지기 다름은 재밌는 것이라 하던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픔이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이럴 때마다 필자는 정말 묻고싶어 진다. 상처 많은 우리는 정말 ‘we are the world’가 될 수 있을까.
어두운 시간 속, 많은 나라들이 약육강식의 논리로 무장한 포식자 앞에 갈갈이 찢겨져 나갔다. 세월이 흘러 선명하게 피를 흘리던 상처 위로 누더기 같은 딱지가 앉았다. 피는 더 이상 나지 않지만 우리는 아직도 아프다.
나를 아프게 한, 우리 민족을 아프게 한 사람 앞에서 우리는 몇 가지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우선 성숙한 국제 시민 사회의 일인이 되어 상냥하게 미소 짓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전통의 강자로 상당히 효과가 좋으며 더 나아가 아름다운 태도라 칭송받는다. 조금 격한 두 번째 선택지는 속에서 올라오는 거부 의사를 확실히 표하는 것이다. 많은 것을 잃게 되겠지만 적어도 속병 걸릴 일은 없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요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취하는 전략, 바로 표리부동이다. 겉으로는 상냥하게 웃지만 속으로는 싸늘한 미소를 흘리며 상대방을 증오하는 것이다.
실제로 비행을 하다 보면 민족간의 갈등을 눈 앞에서 선명하게 보게 된다. 한국인 승객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폭언을 당하는 일본인 승무원, 오늘이 무슨 날인줄 아느냐고 ‘너는 어떻게 난징대학살이 일어난 날도 모르는 거냐’며 날카롭게 소리치던 중국인 승객. 갈곳을 잃은 분노가 전세계를 옮겨 담은 비행기 안에서 폭발한다.
역사 왜곡 발언이 동해 바다를 건너 오는 날이나 핸드폰 액정에 8.15라는 숫자가 뜨는 날을 제외하면, 아무리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역사 인식에 대해 하루종일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지는 않는다. 또 고민한다고 해도 ‘아, 역시 싫어!’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그만이다. 어차피 전후좌우 어디를 살펴봐도 내 삶에 일본인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역사와 문화의 용광로로 출근해야 하는 필자는 조금 더 처절하게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전략을 취하며 살아야 할지에 대해.
우선 속으로는 싫지만 겉으로 웃어주는 건 어쩐지 비겁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싫다. 밥을 먹다 체할 거 같으니 이 안은 기각이다. 그럼 그냥 상냥하게 웃으면서 속으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산다면? 그랬다간 뇌세포가 점점 희석되어 없어져 버릴 것 같다. 그러니 못 하겠다. 그럼 콜라, 사이다 다 섞어 놓은 것처럼 톡 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미안하지만 애초에 그렇게 강단있는 성격으로 태어나지 못했다.
그런고로 필자는 오늘도 전부 막힌 세 갈래 길 앞에서 방황한다. 이 길도 아니고 저 길도 아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던 옛말. 거기다 살포시 한 마디 더 보태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길이 없으면 뚫어라. 어쩌겠는가 목마른 사람은 우물을 파고 길이 필요한 사람은 길을 뚫는다.
필자는 한국인이다. 그렇다고 필자를 구성하는 모든 내적 요소가 다른 한국인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한국인 치고는 개인 플레이를 꽤 좋아하고 외국 생활을 오래한지라 밥보다 빵을 더 선호한다. 무엇보다 나는 나로 있고 싶을 뿐, 한국인 A씨로 있고 싶지 않다. 자랑스러운 나의 한국인 DNA는 내 일부분으로 숨쉬는 모든 순간을 함께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힘들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 존재로 보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영국인으로 혹은 일본인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앤드류와 사카모토로 보면 된다. 내 앞에 동료로, 친구로, 손님으로 다가온 이 사람들을 똑바로 봐야 한다. 보기 싫을수록 더 눈을 부릅뜨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허락할 수 있는 만큼 힘껏 그들을 끌어 안으면 된다. 비난어린 눈초리 없이 책망하는 목소리 없이, 그저 담담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다가가면 된다.
그리고 만약 내 안에 남아있는 분노의 외침이 있다면, 정의에 대한 갈망이 있다면 그건 공평한 곳에서 정당한 통로를 통해 분출할 일이다. 분노로 물들어 누군가에게 돌을 던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결국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내가 선한 방식으로 만든 잔잔한 물결은 결국 큰 파도를 이루어 누군가에게 닿기 마련이다. 지구 반대편 훌륭하신 영부인의 말씀처럼, 그들이 품위를 잃을 지라도 우리는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 닿는다. 손님으로 만났던 그 사람에게도 동료로 사귀었던 그 사람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