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철학 3을 새롭게 시작하며
6월 말이 되면 중학교 철학 2권, ‘변증의 산맥’이 세상에 나온다. 다음 주쯤 마지막 교정을 하기로 했으니 이미 내 손과 내 의지를 떠난 일이다. 하여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
중학교 철학 2의 ‘변증의 산맥’처럼 중학교 철학 3의 부제는 아직 정하지 못하였지만 정해 놓은 차례에 따라 먼저 몇 개의 조각 글을 쓴다. 3권에서 이야기할 주제는 ‘존재’ ‘타인’ ‘세계’인데 이 세 개 주제를 관통할 단어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 달라질 것은 이제 수업을 통한 글쓰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9월이 되면 나는 교사로 돌아가 지수중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과 교육과정 속에 있는 시간과 과목을 이수해야만 한다. 지금처럼 아이들에게 교육과정 밖에 있는 철학 수업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슬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걱정이기는 하다. 아이들과 수업을 통하지 않으니 내 생각에 빠져 내용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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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 쇼펜하우어의 충족이유율을 생각해 본다. 아마도 쇼펜하우어가 중학교 철학 3의 시작 부분에 있을 듯하다.
충족이유율
라이프니츠와 칸트 사이에 위치하는 독일 철학자 Christian Wolff는 그의 존재론에서 ‘비 모순의 원리(principle of non-contradiction)’와 ‘충분 이유의 원리(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를 이야기한다. 비 모순의 원리란 "같은 것이 동시에 있고 없는 것은 일어날 수 없다"로 표현되며, 충분 이유의 원리는 "아무것도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로 설명된다.(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Wolff, Christian” Craig, Edward, 1996)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이론을 대부분 수용하였으나 12개의 범주를 ‘인과성’이라는 하나의 범주, 즉 충족이유율로 단순화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위 볼프의 ‘충분 이유의 원리’를 토대로 하여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쇼펜하우어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 독일어 Ue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에서 4겹, 즉 4가지 원리로 설명한다.
1. 생성의 충족이유율(The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of Becoming): 쇼펜하우어가 불교와 관계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말 역시 불교의 인연(因緣)과 거의 일치한다. 용수 보살은 그의 중론에서 “不生亦不滅, 不常亦不斷 不一亦不異 不來亦不出 能說是因緣”(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일정하지도 않고 또한 끊어지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또한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또한 나가지도 않으니 이를 일러 인연因緣이라 한다.)(중론송, 중론 권 제 일, 관인연품 제일, 용수 지음, 구마라습 한역, 2019.)라고 했다. ‘비슷하다’를 넘어 거의 일치하는 생각으로 느껴진다.
2. 인식의 충족이유율(The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of Knowing): 판단의 논리적 근거에 대한 원칙으로서 하나의 판단이 하나의 인식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근거(쇼펜하우어는 이것을 이성 -Vernunft이라고 불렀다.)를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 판단의 술어는 참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3. 존재의 충족이유율(The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of Being): 시간과 공간은 관계 속에 있으며, 각각의 부분들은 다른 부분 들에 의하여 규정되고 제약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의상대사의 법성게 중의 일부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 仍不雜亂隔別成(잉불잡란격별성), 즉 그로 인해 뒤섞여 어지럽지 않고 나뉘어 따로 이룬다. 또는 얽힌 듯 얽히지 않고 각각 뚜렷하게 이루어졌다. 의 경지와 흡사하다.
4. 행위의 충족이유율(The 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 of Acting): 지금 수행하고 있는 모든 행위에는 모두 그 동기가 전제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쇼펜하우어 지음, 김미영 역, 나남,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