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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024 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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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Nov 17. 2023

허공에 머물다 그림자도 없이 흩어지다.

留虛然無銷影 (류허연무소영) 허공에 머물다 그림자도 없이 흩어지다.


山旁沒濃霧 (산방몰농무) 산 허리 안개에 빠지니,

曉色已晩秋 (효색이만추) 새벽빛 이미 깊은 가을이로다.

虛靜雲影空 (허정운영공) 빈 하늘, 구름 그림자 텅 비니,

枯心飄茫中*(고심표망중) 메마른 마음 아득히 날리는구나.


2023년 11월 17일 아침 안개를 보다.  


일상의 미묘한 분열이 내 정신을 지배하는 요즈음, 때론 안개처럼 불분명함이 필요할 때가 있다. 불투명하고 불분명한 세계의 징표인 안개이지만 그래서 더 편안해질 때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화가들에게 안개는 대단히 특별한 대상이었다. 그리지 않고 그려지는 대상이 바로 안개였다. 단지 화면畵面을 비워둠으로써 때로 안개가 되고, 때로 폭포가 되며, 더러는 큰 강이 되는 신묘한 경지가 바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옛 그림이다.


그 상황을 기계적인 사진이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 허령虛靈의 경계를 꿈꾸며 아침 안개를 보는 나를, 지그시 묘사해 본다.  (사진은 페친이신 #성순옥 님의 사진이다.)


* 석도(石濤, 1642~1707)는 명말 청초의 화가이다. 본래 성은 주朱, 이름은 약극若極이며, 석도는 그의 자字다. 석도는 그의 작품 속 제화 시에서 ‘심령의 경계가 바로 무념의 경계’라고 말한다. 그의 제화 시 중 차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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