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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May 12. 2024

격물치지格物致知

격물치지格物致知


유학의 사서삼경 중 ‘대학大學’의 핵심내용은 이러하다. “왜 공부해야 하는가!” 즉 유학이 지향하는 학문의 목적을 나타내는 짧은 경전이다. 주희에 의해 재편(대학장구)되어 오늘날과 같은 사서삼경의 하나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예기禮記의 일부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주희에 의해 재편된 것이 대학장구大學章句인데 격물치지가 등장하는 구절은 다섯 번째로써 “지식을 지극히 함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다. 사물의 이치가 이른 뒤에 지식이 지극해지고, 지식이 지극해진 뒤에 뜻이 성실해지고, 뜻이 성실해진 뒤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몸이 닦여지고, 몸이 닦여진 뒤에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집안이 가지런해진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평해진다.” 로 되어 있다. 

(물격이후지지物格而后知至 지지이후의성知至而后意誠 의성이후심정意誠而后心正 심정이후수신心正而后身修 신수이후가제身修而后家齊 가제이후국치家齊而后國治 국치이후천하평國治而后天下平) 


여기서 주희는 특별히 첫 부분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하여 자신을 생각을 추가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이다. 


주희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은 128자의 짧은 길이지만 대학의 주요 내용 중의 하나인 인식론에 대한 주희의 생각을 보완한 것으로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 대학에서 언급된 격물치지의 의미는 “사물의 이치를 궁극에까지 이르러 나의 지식을 극진하게 이른다.” (致知在格物, 物格而後知至 此謂知之至也)였는데 ‘보망장’에서는 이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근간에 일찍이 몰래 정자의 뜻을 취하여 격물格物과 치지致知의 관계를 보충하였다. ‘앎을 극진히 한다는 것은 사물을 올바로 파악하는 데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나의 앎을 극진히 하고자 한다면 사물에 있어서도 그 이치를 궁구 하여야 함을 말한 것이다. 사람 마음의 신령함을 알고 있고 천하의 사물 역시 반드시 지극한 이치가 있다. 그러나 사물의 이치를 대해 궁구하지 않기 때문에 앎이 극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태학太學에서 처음 가르칠 적엔 반드시 학자에게 모든 천하의 사물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치에 따라 그것을 따지게 하여 그 극치에 이르기를 구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지력知力을 오래 쓰게 되면 마침내 하루아침에 환하게 이치를 관통하게 됨에, 모든 사물의 겉과 속, 정밀함과 거침에 이르게 되고 내 마음의 온전한 모습과 거대한 쓰임이 밝혀지게 된다. 이것을 ‘사물이 이른다’고 말하고, 이것을 ‘앎의 극치’라 말한다.”(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 전문)   


이를테면 서양 인식론은, 사물을 보는 나와 사물의 관계에 집중하여 나의 선험에 의하여 사물이 판단된다고 생각하는 반면(소크라테스 이후 칸트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격물치지는 사물 본래의 고유한 뜻이 있는데,(“이천하지물而天下之物, 막불유리莫不有理; 천하의 사물 역시 반드시 지극한 이치가 있다.) 그것을 보는 우리의 태도에 따라 충실해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유어리유미궁惟於理有未窮, 고기지유부진야 故其知有不盡也”) 


서양의 인식론과 비슷한 부분은 사물의 인식에 있어 우리의 태도(관점)를 가정한 것이다. 반면 서양에서는 학자마다 사물 자체에 대한 관점이나 해석이 다양한 반면 동양의 격물치지에서는 사물은 우리의 관점이나 태도, 선험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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