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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May 15. 2024

웅숭깊은 하루

深寬日(심관일) 웅숭깊은 하루


萬物暫不留 (만물잠불류) 만물은 잠시도 머물지 않으니,

生命維繁衰 (생명유번쇠) 생명은 다만 번성하고 쇠락하네. 

雲渙遠山靜 (운환원산정) 구름 흩어지고 먼 산은 고요하니,

日得長從意 (일득장종의) 해가 길어지는 의미를 얻었도다. 


2024년 5월 15일 오후. 스승의 날이자 부처님 오신 날. 아침 일찍 산을 갔다가 오후에는 거실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하고 산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는다. 


문득 북송의 화가 범관范寬의 임류독좌도臨流獨坐圖가 생각났다. 


역시 북송의 하권何權이 그림 속에 쓴 화제 시 결구에 ‘부지신재화도간不知身在畵圖間’이라고 썼다. 현재 화가가 머물고 있는 공간이 화가가 그림 속에 묘사한 공간임을 모른다는 이야기인데, 이 말 속에는 그림 속 공간과 화가의 실재 공간이 동일함을 시인은 통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화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그 공간에 있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시인의 존재는 그림이라는 매체와 실재 그 공간에 존재하는 화가가 공간 속에 중첩되어 있다. 거울 속에 또 다른 거울이 그 거울을 비추는 상황이다. 이를테면 그림 속의 공간은 시간과 합쳐지고 합쳐진 시공은 어느 순간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이 가지는 힘이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부분은 우리나라와 중국의 시간 개념은 기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온대 기후 지역이기 때문에 시간을 통상 사시四時(사계절)로 나눈다. 따라서 사시는 실재의 시간이자 절대의 시간 그 자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당사자와 시를 짓는 시인, 그리고 그것을 관조하는 우리는 시공을 넘는, 즉 사시의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두 날이 겹쳐 참 다행인 날 오후……, 쓸데 없는 생각으로 사시의 바깥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해가 참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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