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식 Oct 12. 2024

소리하나

Immer als ein einzelner Tropen es schlägt Wellen, plätschert, und dringt. Das ist Wasser.

언제나 하나인 물방울로 물결치고, 잔잔하다가 스미기도 합니다. 바로 물입니다.


1996년,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지금도 거의 달라진 것이 없지만) 그 시절 우연히 부산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 적이 있다. 사실 그때 누구를 만났는지는 기억이 전혀 없다. 하지만 그 친구와 헤어진 뒤 길을 걷다가 큰 서점에 들렀는데(사실 그 시절만 해도 서점이 아직은 번영하던 시기였다.) 거기서 당시 나에게 큰 감동을 준 책 하나를 만나게 된다. 책 크기는 문고판 정도이고 두께도 시집 정도의 얇은 책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책 내용보다는 빈 공간이 더 많은 책이었다. 바로 판화가 이철수의 판화와 그 글을 독일어로 번역한 책이었다.


소리 하나(Ein Klang)라는 책 제목처럼 매우 관념적인 세계를 판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이야기하는 판화가 이철수의 능력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그 책은 목차가 없는데 이는 우리의 관념과 사고에 있어 순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작가 개인의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서 당시 나에게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중 두 번째로 등장하는 내용이 바로 “언제나 하나인 물방울로 물결치고, 잔잔하다가 스미기도 합니다. 바로 물입니다. “인데 물에 대한 매우 간결하지만 명료한, 동시에 매우 심오한 경지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물은 인류 철학의 근본이자 핵심이며 또한 상징물로써 마땅하고 당연한 진행의 표본이 되는 것이다.


사서삼경에도 모든 것의 핵심이 물이라는 이야기가 자주 많이 등장하다. 그런가 하면 노자 도덕경 8장의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물이 가지는 핵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 외에도 도덕경 32장, 66장, 78장에서 노자는 물에 비유된 이야기를 한다. 뒤를 이은 ‘장자‘ 또한 지극한 것의 핵심을 물에 비유하여 유명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비유를 이야기한다.


『장자』 ‘천도‘에서

水靜 則明燭鬚眉 平中準 大匠 取法焉 물이 고요하면 그 밝음이 (水面을 바라보는 사람의) 수염이나 눈썹까지도 분명하게 비추고 수평하여 목수가 기준으로 한다.


水靜 猶明 而況精神聖人之心靜乎 天地之鑑也 萬物之鏡也 물이 고요하여도 오히려 맑은데, 하물며 정밀하고 신묘한 聖人의 마음이 고요한 경우일까! 그것은 天地를 비추는 거울이며 만물을 비추는 거울이다.(물과 성인의 마음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불교에서도 물은 매우 중요한 비유의 도구로 사용되는데 소승불교의 수행 정도를 사향사과四向四果라 하는데 그 처음을 예류향豫流向이라 부른다. 여기서 ‘예류‘란 바로 깨달음의 길을 ‘물의 흐름‘에 비유하여 그 흐름에 참여한 것, 즉 수행에 대한 확신이 생긴 상태를 말한다. 즉, 깨달음의 과정을 거대한 물의 흐름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서양에서도 물은 그 의미가 매우 심원하다. 기원전 7세기 경의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는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서양 철학의 거대한 줄기인 ‘경험론‘의 시작으로서 중세의 철학적 증명의 주요한 주제였던 질료(Substance)에 대한 최초의 언급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물은 세례(洗禮 baptism)라는 의식의 핵심으로서 이전의 모든 것을 씻어내는 상징으로 존재한다. 그 외에도 예수의 행적 중 물 위를 걷는 것(마태 14장 25)은 예수의 절대성을 드러내는 상징인데, 이때 물(자연)이라는 큰 가치 위를 걷는 절대가치(신, 혹은 절대자로서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렇듯 물은 동, 서양인에게 있어 바탕이나 본질, 그리고 그것의 최고 경지인 깨달음으로 형상화되는데 판화가 이철수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물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물은 단 하나의 물방울로 시작하여, 작은 흐름에서 큰 흐름으로 물결치고 마침내 거대하지만 고요한 바다가 된다. 그 과정에서 대지를 적시고, 생명을 잉태하며, 모든 부정을 쓸어버리고 막힌 것을 거대한 몸부림으로 뚫어낸다. 마침내 모여 완전한 깨달음이 되는 것이다.


97년에 쓴 치기어린 글도 보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주관성, 가변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