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11)
존재자의 가용성(Zuhandenheit=availability)과 순수 존재성(Vorhandenheit=presence)[1]
세계에 대한 인식을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하자면 현존재가 존재자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배려적 태도[2]의 결핍이다. 배려의 핵심 태도는 단지 존재자를 둘러 보는 것이다. 둘러 보는 대상, 즉 배려는 ‘주고 받음’[3]의 상황에서 주고 받는 것과 관계 있는 그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것을 프라그마타(Pragmata=배려를 통한 교섭)라고 불렀지만 그것을 구체화하지 않고 어둠 속에 내버려 두었다.[4]는 것이 하이데거의 입장이다. 하이데거는 배려와 만나는 존재자를 물건(Zeug=stuff)이라 불렀다.
우리는 배려 속에서 만나는 존재자를 물건이라고 부른다. 교섭(만나는)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필기도구, 재봉도구, 작업도구, 여행도구, 측량도구 등이다. 이 도구의 존재양식이 뚜렷이 밝혀져야 한다. 그것은 물건으로 하여금 물건이게 하는 것, 즉 물건의 성격을 먼저 한정하고 이것을 실마리로 하여 이루어진다.[5]
이러한 물건의 성격을 가진 존재자를 하이데거는 ‘가용적 존재’라 하고 그 존재양식을 ‘가용성(Zuhandenheit)’이라 불렀다. 그리고 물건(Zeug)의 성격이 희박하거나 현재로서는 없는 존재자, 이를테면 단순하게 인식의 대상만이 되는 존재자, 오로지 관조의 대상이 되는 존재자(즉 ‘가용적 존재자’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를 ‘순수 존재자’라 하고 그 순수 존재자의 존재 양식을 ‘순수 존재성(Vorhandenheit)’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구분의 핵심은 그 사물, 즉 현존재의 대상이 되는 사물을 대하는 현존재의 태도나 의지에 따른다. 단순히 범주적 또는 인식적으로 대하는 존재자는 순수 존재자이고 실존적으로 대하는 존재자는 가용적 존재자이다.
쉽게 풀이하자면 ‘가용적 존재자’는 필요성이 있는 존재이자 필요에 의한 존재이고 ‘순수 존재자’는 아직 필요성을 가지지 못했거나 현재는 필요성이 없는 존재자를 말한다.
하이데거는 ‘가용적 존재자’로써 자연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숲은 삼림이며, 산은 채석장이며, 강은 수력이고, 바람은 (항해에서) 돛을 펼쳐주는 바람인 것이다. 발견된 주위 세계와 함께 그렇게 발견된 자연을 만나게 된다. ‘손안의 것’으로서의 자연의 존재 양식을 무시하여, 그것 자체를 단지 그것의 온전한 ‘눈앞에 있음(순수 존재)’에서 발견하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발견에는 살아 움직이는, 뜻하지 않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풍광으로서 우리를 사로잡는 그러한 것으로서의 자연은 숨겨진 채로 남게 된다. 식물학자의 식물은 단지 밭 주변에 핀 꽃이 아니며, 지리학적으로 검정 된 강의 발원지는 근본적 의미에서의 샘은 아니다.”[6]
결국 ‘가용적 존재’란 우리의 태도(배려적 교섭) 속에서 만나는 존재자들이다. 위 글에서 그 예시로 사용된 숲(순수 존재)-삼림(가용적 존재), 산(순수 존재)-채석장(가용적 존재), 바람(순수 존재)-돛을 펼치는 바람(가용적 존재)의 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1] Zuhandenheit를 이기상은 ‘손 안의 것’으로 번역하고 소광희는 용재성으로 번역한다. 또 Vorhandenheit를 이기상은 ‘그것 자체’로 번역하였는데 소광희응 전재성으로 번역하였다. (『존재와 시간』,
이기상 역, 까치, 1998, 103쪽,『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지음, 문예출판사, 2003, 64쪽)
[2] 배려적 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배려(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씀)의 의미가 아니라 여기서 배려(Besorgen)는 획득, 수용, 파악의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따라서 배려적 태도라 함은 현존재가 존재자를 Zuhandenheit(손 안의 것, 즉 용재)하는 상황 전체를 가리킨다. 소광희는 존재와 시간에 쓰인 배려의 정의를 현존재가 일상적으로 세계 내부적 존재자와 맺는 교섭(Umagang=handling)이라고 했다.(『존재와 시간 강의』,소광희 지음, 문예출판사, 2003, 64쪽)
[3]주고 받음: 프락시스(Praxis), 즉 연습, 행동, 수행의 의미가 있다.
[4] SZ 11판, 1967. 68쪽.
[5]SZ 11판, 1967. 68쪽.
[6]SZ 11판, 1967. 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