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물 안 개구리

by 김준식

1. 깊이 내려앉기


깊이 내려앉아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은 언제가 좋을까? 누구는 아주 깜깜한 밤, 조용한 곳이라고 이야기할 것이고 누구는 역시 어둡고 조용한 새벽이라고 이야기할지 모른다. 내 생각은 다르다. 최소한 나의 경우는 매 순간이다.


학교에 출근해야 할 날이 이제 3달도 남지 않았다. 출근길에도 문득 ‘나’와 마주한 ‘나’는, ‘나’의 범위를 생각한다. ‘나’의 범위라고 해야 겨우 한 뼘 정도인데 이제 그 범위도 줄여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범위의 방향은 늘 ‘돌아봄’이다. 엄밀하게 본다면 ‘나’의 범위와 ‘나’의 ‘돌아봄’은 ‘나’의 생각에 의해 미분된다. 그 미세한 변화율의 점들이 연결되는 지점 어딘가에 현재의 내가 지나가고 있을 것인데, 안타까운 것은 현재 내 삶의 곡선의 모양이나 세부적인 곡률, 혹은 그 변화의 범위, 나아가 전체적인 얼개조차도 내가 볼 수 없고, 어쩌면 영원히 보지 못하고 나의 생물학적 수명이 다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지속적으로 언제나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야 하는데, ‘돌아 봄’은 ‘마주 함’이기 때문이다. 도덕경에 의하면 “되돌아 감이 도의 움직임”이라고 말한다. (반자反者, 도지동道之動 40장 부분) 이 부분은 서양 철학의 변증법과 유사한 부분도 있지만, 변증법과의 연결고리는 여전히 모호하다. 어쩌면 영원히 일정한 거리를 두고 평행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에게로 되돌아가서 나와 마주 앉는 것이 노자께서 설명한 도의 움직임일 것이라고 희미하게 판단할 뿐이다.


그러고 보니 정작 ‘나’의 돌아 봄은 ‘나’와 마주 함인가? 혹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착각인가? 이 역시 돌아 봄인가?


나의 이 모호하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장자』 ‘제물론’으로 희미하게 위로받는다.

“큰 道는 일컬어지지 아니하고, 큰 말은 말하지 아니하며, 크게 어진 행위는 어질지 아니하며, 크게 깨끗한 행위는 겸손한 체 아니하며, 큰 용맹은 사납게 굴지 않는다.”



2. 우물 안 개구리 (『장자』 ‘추수’)


公子 모牟는 팔뚝을 안석에 기댄 채 한숨을 깊이 쉬고는 “그대는 저 우물 안 개구리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는가?” 그리고 하늘을 우러르며 웃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자라를 보고 말하기를,


“나는 우물 밖으로 튀어나와서는 우물 난간 위에서 깡충 뛰놀다가 우물 안으로 들어와서는 깨어진 벽돌 끝에서 쉬곤 한다네.


물에 들어가서는 두 겨드랑이를 물에 찰싹 붙인 채 턱을 지탱하고 진흙을 찰 때는 발이 빠져 발등까지 잠겨 버리지.


장구벌레와 게와 올챙이를 두루 돌아보지만 나만 한 것이 없다네.


게다가 구덩이 물을 온통 독점하며 우물 안의 즐거움을 내 멋대로 한다는 것, 이 또한 최고일세!


그대도 이따금 와서 들어와 보지 아니하겠는가?”


동해의 자라가 이 말을 듣고 우물 속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우물 입구가 너무 좁아 왼발이 채 들어가기 전에 무릎이 꽉 끼여버려 망설이다 다시 뒤로 물러나서 개구리에게 바다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저 바다는 천리의 넓이를 가지고도 그 크기를 표현할 수 없고 천 길의 높이로도 그 깊이를 다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네.


하夏의 우禹임금 때에는 10년 동안에 아홉 번이나 홍수가 났지만 그래도 바닷물이 더 불어나지는 않았지. 또 은殷의 탕湯임금 때에는 8년 동안에 일곱 번이나 가뭄이 들었지만 그래도 바닷물이 줄지도 않았다네.


시간의 장단長短에 좌우되는 일도 없고 빗물의 다소多少로 물이 늘고 줄지 않는 것, 이것이 또한 동해의 커다란 즐거움이지”


우물 안 개구리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고 너무 당황해서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요즘 내가 그 개구리가 된 느낌이다.


표지 그림은 GPT가 그린 그림인데

좁은 우물 안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개구리

우물 밖은 푸른 하늘과 넓은 세계가 펼쳐짐

개구리는 자만한 표정이거나, 혹은 세상에 대해 무지한 듯한 모습

고전 동양화풍 또는 수묵화 분위기로 그려 준다더니... 왠걸... 별 이상한 놈을 다 보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