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2025년 6월 16일 이런저런 생각
1. 합리적 혹은 논리적이라는 것에 대하여
장자 제물론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以指喩指之非指(이지유지지비지) 내 손가락으로 저 사람의 손가락이 내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불약이비지유지지비지야) 내 손가락이 아닌 것으로 내 손가락이 저 사람의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라는 기묘한 논리가 등장한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분명한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장자가 노린 것은 아마도 그 점일 것이다. 즉, 우리가 논리적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매우 큰 허점이 도사리고 있다. 확신하고 있는 것이 한순간 거짓이 될 수도 있고 맹신하는 것이 일순에 배신할 수 있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다. 그러니 어떤 것도 완벽하게 논리적, 합리적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야기를 20세기 서양 철학자 하이데거는 ‘아포판시스’라고 부르며 매우 난해하게 그의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즉 언어로 표시되는 것은, 또 다른 언어에 의해 해석되고 해석의 도구로 사용되는 되는 언어가 가진 속성(현상)에 의해 본질적인 것이 왜곡되거나 혹은 과장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득, 매일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믿으며 한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을 반추해 본다. 더불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일들도 동시에 반추하고 의심해 본다.
2. 정치판 혹은 아사리(阿闍梨, ācārya) 판
정치하는 사람들이 있는 장을 말할 때 우리는 ‘정치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 ‘판’의 일부에는 싸움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왜 싸우는가? 당연히 권력 때문이다. 권력의 속성은 절대 양분될 수 없고 동시에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정치판은 살풍경하고 피아의 구분이 없다. 따라서 언제나 속이고 배신하며 또 연대하기도 하는 이율배반과 음모가 그 속에 있다.
그런가 하면 정치의 대상인 보통 사람들은 정치가들보다는 덜 배신하고 덜 이율배반적인 삶을 산다. 왜냐 하면 보통의 우리에겐 싸워서 가져야 할 권력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거대한 음모 따위도 없다. 음모가 없는 우리가 정치판의 음모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무서움 혹은 서글픔이다. 그 서글픔은 우리의 처지에 대한 자조적인 슬픔을 포함하여 인간에 대한 연민의 서글픔까지 포함된 약간은 복잡한 것이고, 무서움 또한 어두워서 불쾌한 느낌, 즉 불확실성과 불투명함에서 오는 무서움이다.
권력의 내부적 속성은 이익의 독점에 있다. 즉 권력을 가진 자들만이 가질 수 이익의 수호를 위해 그들은 권력에 복종하고 권력을 유지하려 든다. 사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이 권력의 이익을 누려 본 적이 없다. 따라서 그 맛도 느낌도 전혀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장차관 자리를 공모한다 하니 너도 나도 ‘나인가?’하는 병이 걸린 모양이다. 대중에 대한 시혜인지 아니면 대중을 현혹하는 사술인지 사실 모호한 부분이 많다. 어떤 이를 임명해 놓고 대중의 의지라고 한다면 반박할 이유가 없다. 그것을 노리고 있는가? 옳고 그름을 떠나 이 방식은 문제가 있다. 추천이나 천거가 가지는 최악의 문제는 연줄이다. 강호의 은둔 고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연줄에 잘 엮인 사람들끼리의 잔치일 공산이 매우 크다. 동서고금의 역사가 이것을 방증한다.
벨기에 출신의 초현실주의 화가 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가 그린 선택적 친화력(Elective Affinities)이라는 그림이다. 논리와 합리를 넘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