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피의 역사 2.

프랑스 파리

by 김준식
콩코드 광장에 홀로 서 있는 불편한 오벨리스크
튈를리 정원, 멀리 오르세 미슬관이 보인다.
이름모를 타국의 전시장에 누워있는 이집트의 석관
그리스의 예술품 니케상

3. 루브르

약 38만 점의 소장품 수를 가진 이 거대한 박물관이자 미술관은 루이 14세가 새집(베르사유 궁전)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박물관으로 쓰이는 단초가 된다. 당시의 건물은 일부 남아 현재의 건물과 연결되어 있다. 루브르는 프랑스혁명을 통해 오늘날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예술을 일반에게 공유하고자 하는 국민의회의 의지가 반영되었던 것이다.


박물관 앞은 튈르리 정원은 프랑스혁명의 어두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지금은 그저 파리 시민들의 좋은 휴식의 공간이다. 다만 관광객인 나는 튈르리 궁 앞, 콩코드 광장에 서 있는 오벨리스크가 불쾌할 뿐이다. 오벨리스크가 왜 거기 서 있는가?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의 유물이다. 그것도 이집트의 신인 태양신을 향한 그들의 숭배와 이상을 상징하는 거대한 석조 조형물이다. 이집트를 점령한 서양의 열강들은 이 오벨리스크를 그들의 나라로 탈취해온 뒤 그들의 나라 광장에 세우고 나름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제일 가관은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 중앙 광장에 세워놓은 오벨리스크다. 유일신을 믿는 가톨릭의 본산인 바티칸에서 온갖 종류의 신들이 번성했던 이집트의 물건을 그것도 태양신 숭배를 상징하는 오벨리스크를 세워놓았다는 것은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삐딱한 나는 오벨리스크가 거기 서 있는 것이 불편할 뿐이다. 수많은 사람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던 그 콩코드 광장에 서 있는 참 어울리지 않는 오벨리스크.


셜리관, 드농관, 리셜리외관으로 구분된 루브르는 인산인해다. 거대한 유리 피라미드 밑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는 테러방지를 위해 검문검색이 철저해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꾸역꾸역 들어온다. 뭘 보러 왔는지 나 자신도 잘 알 수 없을 만큼 유물과 그림이 즐비하다. 이집트의 유물 약 5만 점이 고대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그리스, 에트루리아, 로마의 유물들이 이곳저곳을 가득가득 채우고 있다. 그 유물들이 이곳 루브르에 오기까지 있었던 총과 칼과 화약 내음, 그리고 도둑질, 붉은 피가 오직 나에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단연코 튈르리 궁의 오렌지 온실이 변한 오랑주리 미술관이 루브르에 비하여 더 행복한 경험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최소한 거기에는 루브르의 약탈과 전쟁으로 인한 노획물은 단 한 점도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인간의 미적 감흥을 자극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이야기한다. 지금 루브르에 전시된 타국의 물건들이 비록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하더라도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우리의 미적 감흥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지배와 약탈의 흔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것들은 나의 미적 감흥을 자극할 수 없는 물건들이다.

이집트의 스핑크스와 여기저기에서 도굴되었을 미라와 그 관들이 우리 핍박의 역사를 보는 것 같아 내내 마음이 아팠고 이집트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찬란한 고대 문명의 흔적들이 타국의 박물관에 전시될 수밖에 없는 힘의 논리가 그저 불편할 따름이었다.


튈르리 정원 옆 오랑주리(Orangerie, 오렌지 온실)는 이러 루브르의 불편함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운 작고 아름다운 미술관이다. 물론 그곳에도 불편함은 있다. 오랑주리에는 모네의 대작 수련이 있는데 모네는 잘 알다시피 일본 예술, 특히 우끼 요예의 수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고흐나 앙리 마티스의 작품에서 쉽게 일본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는데, 삐딱한 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지배와 피지배, 제국주의, 식민, 억압, 속박 등의 단어들이 나에게로 와서 내 머릴 휘젓는 바람에 마음이 완전히 편하지는 않다.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Jean Douis Géricault)의 Le radeau de la Méduse, 1819

루브르의 회화 중 가장 강렬한 것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침몰이다. 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이러하다. 이 그림이 왜 강렬한가? 바로 우리 세월호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메두사 호는 프랑스의 프리깃 전함을 개조한 배로 1816년 세네갈의 생 루이 항구를 차지하기 위해 위그 드 쇼마리라는 경험이 전혀 없는 선주가 네 척의 배를 이끌고 가는 중이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여 부르봉 왕조가 복위했고, 메두사 호의 선주 위 그 드 쇼마리는 오래된 왕당파로서 복고된 부르봉 왕조에게 자신을 드러낼 목적으로 항해 경험이 전무했음에도 배를 이끌고 가다가 7월 2일, 모리타니 앞바다에서 네 척의 배를 모래톱에 좌초시키고 만다.

1816년 7월 5일 살아남은 사람은 147명 정도였는데 이들은 급조한 뗏목으로 표류해야 했다. 대부분이 구출까지 13일이 걸렸는데 그동안 사망하고 살아남은 15명도 기아, 탈수, 식인, 광기에 노출되게 됐다. 사건은 국제적 스캔들로 프랑스 왕정복고의 당국의 지휘 하에 있던 프랑스군 지휘관의 무능이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제리코는 청탁을 받고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최근 일어나던 유명한 비극적 사건을 의식적으로 주제로 택함으로써 이 그림은 세간의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켰고 더불어 제리코 자신의 이름도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제리코는 이 거대한 그림(491 cm × 716 cm )을 그리기 위해 사전에 다양한 사항을 조사해 스케치를 반복하면서 여러 개의 습작을 제작하고 난 뒤 이 그림을 그렸다. 그는 생존자 2명의 소재를 파악하고 직접 그들에게 질문을 통해 당시 그들이 타고 있던 뗏목의 정밀한 축척 모형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사고로 죽은 자들이 있던 시체 안치소와 병원을 오가며 죽은 사람이나 죽어 가는 사람의 피부 색깔과 질감을 직접 관찰했다.

그림을 그린 제리코는 이 그림을 그린 후 스스로 논란을 예측했는데 1819년 살롱·드·파리에 이 그림이 전시되자이 그림은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일으키는 격렬하고 열띤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를 통해 당연히 제리코는 국제적 명성을 획득하였고 이것은 그를 초기 낭만파 회화의 정점에 올려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리코는 메두사 난파 사건을 테마로 삼아 부르봉 왕조의 보수적이고 무능한 본성을 고발하는 동시에 인간의 야만성에 대해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격정이 녹아있는 그림으로 고발하고 있다.


제리코의 메두사 호와 우리의 세월 호는 사실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위 관료들의 비 인간적인 무관심과 야만이 나폴레옹 몰락과 왕정복고 이후의 프랑스 관료들의 무능이 놀랍도록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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