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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Nov 15. 2017

의심하지 말지어다.

영화 "Tree of life"(2011년 개봉)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욥 1:11)


천지창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보여주는 약 20여 분간의 서사를 통해 감독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는 듯했으나 로우앵글의 어지러움과 클로즈업의 아찔함만 가득한 화면, 그리고 가끔씩 들리는 알 수 없는 독백으로 해서 나는 영화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아버지


오브라이언(브레드 피트 분)은 엄격하고 자기중심적이며 권위적인 아버지다. 음악을 하고 싶었으나 한 순간의 방황으로 건축가의 길에 들어선 그는, 열심히 기술을 개발하여 제법 그 방면에 일가를 이루었으나 늘 음악의 길로 가지 못한 자신의 삶을 후회한다. 이 후회의 대부분을 그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투영시킨다. 가끔씩은 제법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그는, 아이들에게 엄격하다 못해 아이들을 과격하게 다룬다. 식사예절을 지키지 못한 둘째의 멱살을 잡고, 그것을 말리던 첫째를 가둬버리는 횡포를 부린다.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려는 욕심 때문에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내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무시한다. 삐딱하게 사회를 보고 삐딱하게 세상을 대한다. 상속재산을 경멸하고 돈 가진 자들에 대한 불만이 있지만 분노를 표출하지는 못한다.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그에게서 오로지 하나님에게로 향한 신앙심은 읽을 수는 없다. 그의 눈은 언제나 우수에 차 있고 강한 면모 뒤에 있는 약한 스스로를 위장하고 있다. 

어머니


오브라이언의 아내이자 어머니(제시카 차스테인 분)는 순결한 영혼의 소유자이며 남편인 오브라이언에게 알 수 없는 분노를 가지고 사는 여자다. 아이들은 그녀 자신이 가진 영혼의 反映이며 그녀의 전부와 같다. 둘째 아이를 잃은 뒤에 보여주는 그녀의 모습에서 아이들이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게 한다. 喪明이라 했던가! 공자의 제자가 자식을 잃고 눈이 멀어 버린 것에서 유래하는 이 말은 자식을 잃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준다. 남편의 무지막지한 아이들의 교육방법에 그저 바라볼 뿐 한마디의 저항도 없다. 어쩌면 남편의 그런 행동을 묵인하는 듯 한 느낌조차 주지만 그녀에게는 저항할 아무런 힘이 없다. 단지 아이들을 보듬어 안음으로써 어머니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자신의 남편이 세상의 부조리라면 자신은 그 부조리 중 어떤 것도 막아내지 못하고 그저 눈물 글썽이며 지켜보고, 오히려 그 부조리의 확대 재생산에 일조하고 마는 듯 한 존재로 비친다. 이것은 아마 감독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부조리를 일으키는 당사자보다 그것을 지켜보며 말없이 외면하고 마는 국외자들이 더 나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아이들


첫째 아들 잭(헌터 맥크랙켄 분-어린 시절, 숀 펜 분-어른)은 눈망울이 큰 소년이다. 아버지인 오브라이언을 처음에는 싫어하다가 갈수록 두려워한다. 마침내는 자신을 죽이고 싶으면 죽이라는 극단적인 말을 하는 반항 소년이 된다. 유년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잭도 친구와 함께 알 수 없는 이유로 나쁜 짓을 하고 싸우고 훔치며 동생들과 싸운다. 함부로 하는 행동을 아버지로부터 제지당하면서도 별생각 없이 그 일을 계속하고 하나님에게는 늘 불만이 많다. “왜 착하게 살아야 하나요? 당신은 아니면서...” 로부터 시작해서 어른이 된 뒤에도 “어머니, 아버지. 저는 당신들과 지금도 씨름하며 지냅니다.” 등으로 불만과 회한과 억눌림을 표시한다. 가장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표정의 소유자인 이 아역 배우는 분노와 두려움, 갈구와 억압의 심리, 좌절과 연민을 그 큰 눈망울에 담아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어른 역의 잭(숀 펜 분)은 도시의 무표정을 닮아 있다. 살아가는 것이 단순한 과정의 일부일 뿐 특별한 의미나 뚜렷한 목표를 가진 존재는 아니다. 그가 스치는 사물이나 사람들은 그로부터 멀어지거나 혹은 가까워지는 객체일 뿐, 그에게 어떤 영감도 주지 못한다. 오직 빛에 반응하는 원시세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보인다. 여전히 어린 시절의 억압과 분노를 가진 채 살아가는 단지 크기만 커진 불만과 두려움과 억압의 어린 잭일 뿐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처럼 음악을 이해하는 소년으로서 형인 잭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는 19세에 죽음으로서 영화 전체에 알 수 없는 어둠과 슬픔을 느끼게 해 주지만 어린 시절 모습은 해맑고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영화의 배역이지만 아버지 역을 맡은 브래드 피트와 매우 닮은 모습이어서 영화적 공감을 조금 느끼게 한다.


욥기, 그리고 여호와


창조론의 입장에서 보면 여호와는 전지전능하고 동시에 스스로 존재하므로 만물을 내거나 혹은 거두는 일은 그분의 의도대로 이루어진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완전히 그분의 의도에 따른 존재, 즉 피조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아무런 결정권도 없고 계획도 있을 수 없다. 모두 그분의 계획이며 그분의 생각이다. 우리에게 끝없이 솟아나는 의심은 죄악이며 그분의 존재에 대한 탐구조차 창조주에 대한 배신이며 동시에 피조물의 의무 위반이다. 구약성서에 욥은 사탄이 여호와에게 던진 단 한 미디의 말, 어쩌면 여호와를 비아냥거린 이야기일지도 모를 말에(욥 1:11) 인간으로서 차마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과 환란을 겪지만 그는 충실한 여호와의 도구이므로 한 번도 그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환란이 끝나고 여호와는 그에게 복을 주어 천수를 다 누리고 행복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절대자에 대한 전적인 복종, 신의 도구로서의 존재인 인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성경은 욥기를 통해 여호와는 그런 존재임을 분명히 한다. 


사족


모호한 문법은 영화를 지루하게 한다. 극적인 반전이나 장면은 거의 없다. 알 수 없는 빛의 각도와 뚜렷하지 못한 윤곽들, 무표정한 사람들과 앵글의 각도에 의해 형태가 달라지는 건물들, 천국의 계단인 듯 한 나선형의 건물구조와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건조한 사막. 이 또한 질서 속에 있음이라! 하지만 보통의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보이는 것 외에는 볼 수 없는 눈이 안타까울 뿐이고 또 그 이상을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단순한 피조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의 움직임을 따른 아이 눈높이의 핸드 핼드 카메라의 어지러운 시야에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여기는 환란의 세상이며 그 어떤 노력도, 그에 따른 어떤 정화도 신에게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그것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이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슬픔, 기쁨, 분노, 억압의 감정을 신의 섭리로 정화하고 또 신의 섭리로 감내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삶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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