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타자로서의 자아

송하처사도

by 김준식

그림의 왼쪽 위에 쓰인 글씨는 다음과 같다.


松是癯骨石是頑骨人是倣骨(송시구골석시완골인시방골), 然後方帶得抱膝長嘯眼冷一世之意(연후방대득포슬장소안냉일세지의), 小塘其眞畵神者乎(소당기진화신자호),使我作磋松老石怪人詭而己此寫形者也(사아작차송노석괴인궤이기차사형자야)


풀이해 보자면


소나무는 구골이고(여리고 - 가지를 뻗은 것에 방점을 두어) 바위는 완골이며(완고하며) 사람은 방골(이것을 흉내 냄)이다. 이런 후에야 비로소 무릎을 안고(무릎을 구부리고 바로 앉아), 휘파람 길게 불며 세상을 차갑게(흰 눈 – 백안과 동일한 의미이다. 혹은 냉정하고 싸늘하게) 보아야 하는 하나의(큰, 혹은 뚜렷한) 뜻이 있다. 소당(이재관)은 참으로 ‘그림의 신’인가?(신인 모양이다.) 나에게(조희룡) 이 풍경을 그려 보라고 했다면 그저 소나무는 늙게 그리고, 바위는 기이하게 그렸을 것이며 사람은 드러난 것만 그렸을 것이니 이는 그저 모양만 나타낸 것이다.


조희룡(趙熙龍, 1789년-1866년)은 조선 후기의 화가다. 본관은 평양이고 출생지는 서울이다. 자는 치운(致雲)이며 호는 여러 개를 가지고 있는데 석감(石憨), 철적(鐵笛), 우봉(又峰), 호산(壺山), 단로(丹老), 매수(梅叟) 등으로 불린다. 화가이지만 문장과 시에 능통하여 1847년에 벽오시사(碧梧詩社)를 결성했으며 왕명(헌종)을 받아 금강산 유람 시를 썼다. 그림은 난초와 매화를 잘 그렸으며 글씨는 추사체에 정통했다.


이 그림의 작가인 이재관과는 막역한 사이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그림의 題詞가 그 증거이다.


그러면 그림을 보자.


소나무 밑에 있는 사람은 속세의 사람이 아닌 듯 느껴진다. 반가부좌를 틀고 앉은 자세가 예사롭지 않다. 수염이나 복색으로 보아 도교의 眞人인지도 모른다. 옆에 시동까지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과감한 생략으로 표현한 옷매무새와 얼굴 생김새로 보아 이 땅의 사람 같지는 않은데(조선 시대 우리 그림의 인물들이 가진 한계일지도 모른다. 마치 해방 이후 우리나라 중 고등학교에서 데생 모델로 유명했던 아그리파, 줄리앙의 석고 상처럼 우리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잘못된 교육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소나무의 표현이나 나머지 화면의 구성은 우리 그림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였던 이재관의 송하처사도이다. 이재관(李在寬, 1783년 ~ 1837년)은 조선 후기의 화가이다.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원강(元剛), 호는 소당(小塘)이다. 이재관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솜씨가 뛰어나 아버지가 없는 집안 살림을 그림을 팔아 꾸려 나갈 정도였다. 정식으로 누구로부터 그림을 배우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의 그림 소재와 표현방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독창적이고 독특했다.


물론 그런 이유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그림처럼 중국의 남종화와 북종화 그리고 우리의 화법(겸재로부터 단원에 이르는)까지 다양한 것들이 녹아들어 있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태조 어진을 모사한 공으로 종 4품에 해당하는 등산 첨사가 되기는 했지만 그 뒤의 그의 행적은 기록이 없다.


소나무의 표면을 그린 준법(皴法)은 雨點皴(우점준) 혹은 馬牙皴(마아준)이나 米點皴(미점준)을 혼용하여 매우 거칠고 두터운 입체감을 살린다. 그것은 강직한 소나무를 표현해내기 위한 소당 특유의 준법으로서 겸재 이후의 여러 화가들이 사용한 준법에 영향받은 바 크다. 가지를 밑으로 내린 소나무의 잎들은 세부적 묘사보다는 뚜벅 큰 점을 찍고 약간의 손질을 가해 표현함으로써 전체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뒤편 배경이 되고 있는 산의 모습은 지나칠 정도로 희미한데 이는 소나무를 강렬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소당의 의도였을 것이다. 6폭 병풍 중의 하나인 이 그림에는 당시의 뛰어난 화가이자 서예가인 조희룡의 題詞가 왼쪽 위에 있다.


곧게 뻗은 소나무 등걸이 위에서 두 갈래로 뻗고 하나는 밑으로 또 하나는 사선으로 뻗어 있다. 이는 자신의 삶을 자연, 즉 소나무에 이입하여 나타내고, 다시 그림에서 고고한 처사로 표현된 또 다른 자신이 소나무로 표현된 스스로의 삶을 객관적으로 쳐다보는 중첩적 구조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꿋꿋하게 자라 장송이 되었지만 험한 세파(당시의 정치상황) 때문에 스스로 몸을 피해 다시 자연으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다시 조용히 올려다보고 있는 장면에서 우리는 소당의 회화적 思惟(사유) 공간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낙관 옆에 적혀있는 소당이 쓴 화제는 이런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백안간타세상인(白眼看他世上人)이라고 쓰여 있는데 여기서 백안이란 말은 유명한 중국의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완적(210년 ~263년,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 말의 시인이며, 자는사종(嗣宗)이다.)의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완적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 오면 흰 눈을 흘기면서 무시하였다고 한다. 완적이 흰 눈을 뜨며 반갑지 않은 사람들을 맞이한 것처럼 소당은 그런 눈으로 순종, 헌종 연간의 세도정치로 혼란스러운 세상을 백안시 하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추스르는 모습을 이 그림으로 나타내고있는 것이다. 조희룡은 이를 안냉(眼冷)으로 묘사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