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 연주
밤이 되니 바람이 속도를 내며 출렁거린다.
봄날이 깊어지고 있는 증거들이다. 바람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 알 수 없는 공기의 흐름은 흔적도 없이 나무를 흔들고 잎을 흔들며 마침내 나를 흔든다. 나의 내부를 흔든 바람 탓에 내 영혼 곳곳에 흩어져있는 감각의 촉수가 흔들리게 되고 그로부터 새로운 영감이 돋아난다.
시원성에 근거하여 본다면 고작 몇 개의 시각적 신호이거나 아니면 단순한 촉각이나 경험의 기억 이상의 것도 아닐 텐데 스스로는 그 감각의 촉수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부터 전혀 새로운 장면으로의 전환을 꾀한다.
즉, 바람으로부터 일어나는 몇 가지의 감각적 추론은 새로운 형태의 논리적 구조를 획득하게 되고 그로부터 다시 중첩적 기억으로 나의 뇌 어디쯤 쌓여 갈 것이다. 오늘의 기억은 지금 유효하지만 내일이 되면 유효성을 장담할 수 없다. 그것이 감각이고 기억이다. 흐려지는 것에 우리는 가끔씩 절망하지만 따지고 보면 흐려지지 않는 것을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한 낮동안 바람은 붉은빛이 도는 연초록 새싹을 단 느티나무와 화려하지도 않은 꽃을 매단 오리목을 흔들고 낮게 깔리면서 제법 자란 크로바 잎과 쑥부쟁이, 그리고 희고 노란 민들레를 흔들더니 마침내 밤이 되어 대지를 흔들고 천지에 가득하더니 다시 잠잠해진다.
베토벤의 비창은 피아노 소나타로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인 비창과 이름은 같으나 느낌은 다르다. 베토벤의 음악이 인간 내면의 음울함의 표현이라면 차이코프스키의 슬픔은 보다 외부적인 것에 중심이 있다. 하기야 슬픔이 내부면 어떻고 외부면 어떠하리! 하지만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조성진은 전 세계적으로 피아노 연주 무대에 등장한 혜성 같은 존재다. 나이는 어리지만 곡 해석과 건반의 터치, 무대 메너 등은 세계 그 어떤 연주자보다 더 훌륭하다. 그의 연주로 봄 밤, 비창을 들으며 불어도 불어도 흔적 없는 바람을 느낀다.
https://www.youtube.com/watch?v=QqGCViBslS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