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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n 21. 2018

'존재'와 '세계'

2018년 6월 21일 하짓날 밤 반달.

今維離堅白(금유리견백)* 지금 리견백의 논리를 생각해 봄. 


卽示瞬異體 (즉시순이체) 보이는 즉시 다른 것이요, 

卽聞非此其 (즉문비차기) 듣는 즉시 그 말이 아니로다. 

今晝蒼天高 (금주창천고) 오늘 낮, 푸른 하늘은 높더니, 

半月忽顯視 (반월홀현시) 문득 나타난 반월을 보네. 


* 리견백 혹은 견백론: 유명한 백마비마와 함께 공손룡의 논리적 주장이다. 명칭과 개념의 구분에 대한 논리적 표제이다. 즉 본체와 외관의 혼동을 지적한 것으로서 궤변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매우 논리적인 접근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흰돌(차돌)의 흰색은 돌이 아니고 돌은 역시 흰색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차돌(흰돌)을 보며 흰색으로 지각하는 순간, 그것은 시각에 의한 감각으로 변했기 때문에 거기에는 딱딱한 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시 딱딱한 돌이라고 인지하는 순간, 거기에는 흰색의 자리는 없다는 이야기다. 다소 황당하지만 면밀하게 보면 매우 논리적인 증명이라는 것에 수긍이 되기도 한다. 


6월 21일 하지. 낮 시간이 14시간을 넘고, 한 낮 하늘은 가을처럼 높았고 온도는 30도를 웃돌았다. 밤이 되니 조금 선선해졌고 반달이 문득 떠 올랐다. 


『장자』에 등장하는 많은 비유들은 때로 몹시 황당하고 지금의 우리 삶에 유용해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2300년 전 이야기가 지금 유용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곤(鯤)과 붕(鵬), 뱁새와 황새, 나비와 꿈 이야기를 장자가 하지 않았다면(사실 쓸모 있는지 없는지 누가 알랴?) 지금, 넓고 광막한 인간의 정신과 마음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어찌 느껴 볼 수 있겠는가?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世界)’는 ‘존재’의 형식이다. 무슨 뚱딴지 같은 ‘존재’와 ‘세계’인가? 역시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언어, 이를테면 목소리를 통해 외부로 표출되는 각종의 말은 이미 그 이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을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순간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그렇다! 분명한 것은 없다.  


『장자』 추수편 마지막에 혜공이 따졌던 논리성은 도대체 어느 곳에 쓰이는 것인지 여전히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혜공에게 그 논리를 뒤집어 설명하는(조금은 억지스러운) 장주의 마음도 역시 우리는 알지 못한다. 미세하게 더욱 미세하게 세계라는 존재형식에 대한 하이데거의 고민에 대해서도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오늘 햇살이 뜨거운 하짓날 낮과 선선해진 밤을 보내며 '존재'와 '세계'를 천천히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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