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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Feb 12. 2019

무표정의 스마일 리
불친절한 알프레드슨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 스파이(2011)

장면, 그리고 풍경


단지 긴장감을 주는 장치는 음악뿐이었다. 자주 보아 온 스파이 영화의 익숙한 장면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스파이 영화라면 당연히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 총격 장면도 영화 내내 두서너 번 정도 나올까 말까 하고 요즘 영화에서 흔하게 나오는 폭파, 자동차 추격, 첨단장비(물론 시대가 좀 다르기는 하지만)는 그림자도 없다. 


현장 스파이 요원들은 뛰지도 않고 빠른 카메라 워킹도 없다. 한가롭게 수영을 하는 장면만 나온다. 간부들은 모자이크 벽지가 있는 회의실에서 회의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담배연기 자욱한 사무실에서 단지 서성거릴 뿐 바쁘다거나 서두는 모습은 없다. 이를테면 평범한 사무실 풍경인 셈이다. 그런데 여기가 대영제국의 첩보업무를 담당하는 서커스 본부라니! 


실제 MI6 요원으로 재직했던 경험을 토대로 쓰인 원작 소설을 느낌을 최대한 반영하려는 감독의 의도는 영화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원작의 묘사처럼 사무실은 대부분 갈색 톤이다. 갈색은 심리학적으로 피곤함, 무기력으로 상징되는데 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는 지루함과 무기력에서 오는 피곤함이다. 한정된 지역과 한정된 공간에서 오는 불분명한 답답함과 억압 감은 아마도 이런 종류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의식 저변에 깔린 그 무엇이 아닐까 하고 감독은 조심스레 추측한다. 더불어 우리 관람객들은 그 의도대로 슬며시 영화에 빠져들게 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 영화에서 첩보영화 냄새를 풍기는 몇 안 되는 중요한 장면이다. 서커스의 수장인 컨트롤(존 허트 분)이 현장요원 짐 프리도(마크 스트롱 분)가 집에 도착했을 때 하는 대사 “ 미행은?”이 그 장면이다. ‘미행’이라는 대사를 통해 이 영화의 분위기 결정하는 감독의 의도는 비교적 성공한 것으로 생각된다. 프리도는 이 임무를 수행하다가 총격을 받고 임무는 실패한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긴장감이 유지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뒤 원작 소설을 따르는 것인지 아니면 감독의 독자적인 의도인지 시간의 배열이 꼬이기 시작한다. 


여러 개의 사건들을 중첩적으로 각기 다른 타임라인에 배치됨으로써 관객들은 사건과 시간의 미궁으로 빠져들게 된다. 아무런 설정도 없는 갑작스러운 회상 장면이 문득문득 배치되어 각 장면에 집중하는 순간 관객은 타임라인을 잃었다가 잠시 뒤 다시 회복하는 것을 영화 내내 반복하게 된다. 결국 영화의 끝에 가서야 비로소 큰 덩어리로 이해되는데 처음에는 감독의 불친절함에 은근히 화가 났지만 나중에야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즉, 소설을 읽듯이 영화도 집중해서 읽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의 찰진 맛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조직 내에 침투해 있는 두더지를 색출해내는 단순한 구조이지만 그 구조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당시 냉전체제의 복잡성과 무관하지 않다. 적국을 위해 일하는 스파이인 줄 알면서도 그를 제거하지 않는 것은 그 스파이를 통해 역시 적국의 정보를 빼내려는 이중 작전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 작전은 실제로 냉전시대 내내 각국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이들은 포섭되거나 또는 끝까지 임무를 완수하기도 한다. 그리고 배신한 그들을 제거하거나 그들을 지키려는 이야기는 수많은 스파이 소설의 소재가 되어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한 것들이다.


어쨌거나 스마일리는 은퇴 후에 앞서 프리도가 실패한 임무를 대신하여 서커스 내의 두더지를 색출해내는 임무를 맡게 된다. 최근 인기 있는 영국 드라마 ‘셜록 홈즈’의 주인공 베네딕트 컴버배치(피터 길럼 역)와 스마일리를 도와 사건을 해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그의 영국식 발음과 표정연기는 꽤나 인상적이다. 물론 스마일리의 압도적 표정연기에는 미치지 못하는데 스마일리의 무표정 속에 미세하지만 변화무쌍한 표정연기는 게리 올드만이라는 명배우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길럼은 영화 중반 이후를 거의 책임지고 있다.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 리키 타르(톰 하디 분)는 조직 내에서 배신자로 몰렸으나 스마일리에게 의탁하여 사건의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얼마 전 개봉되었던 영화 ‘워리어’의 복서 이미지와는 달리 유약하고 감정적인 풋내기 스파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의 경험은 타임라인은 다르지만 스마일리의 경험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원작의 느낌을 살린 연출의 기술이라 할 만하다. 안타깝게도 콜린 퍼스(빌 헤이든 역)는 비중도 작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인상적이지 못했다. 


해석되지 않는 몇 가지 장치들


프리도가 헝가리에서 총격을 당하기 직전 위층 어딘가에서 노파 한 명이 불안한 표정으로 아래를 보고 있다. 그 뒤 총격이 일어나지만 이 노파와의 연관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처음, 이 장면을 하나의 큰 그림으로 이해하려 했지만 영화 내내 도대체 그 노파는 왜 창밖을 보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그 답을 결국 찾을 수 없었다. 


스마일리의 수영 장면은 소소한 일상의 사건들을 엮어내는 멜로 영화, 혹은 극적 반전이 덜한 심리드라마 영화에 적합한 장면이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이 영화를 표방한 이 영화에서 스마일리의 수영하는 장면은 이 영화 속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데 이 부분에 대한 감독의 의도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어쩌면 스파이라는 직업도 일반 샐러리맨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일이며, 일상에 매몰된 현대인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일 것이라고 단지 추측해 볼 뿐이다. 


비행기가 다가오는 장면도 그렇다. 스마일리와 토비(다비드 덴칙 분)가 대화하는 과정에 활주로에 프로펠러 비행기가 내려앉고 서서히 두 사람에게 다가온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이것은 분명 살해에 대한 위협이다. 하지만 비행기의 프로펠러는 아무 일 없이 두 사람 앞에서 멈추고 만다. 장치를 통한 관객의 느낌을 낚시했단 말인가? 그 조차도 감독의 의도일까? 나로서는 요령부득이다. 


아내의 부정을 지켜본 스마일리의 표정은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빌 헤이든과 바람 난 아내의 모습을 보여준 이 장면은 스마일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함인가 아니면 스파이라는 직업이 가지는 개인적 고뇌의 표현인가. 영화 내부에서 이 장면은 어떤 장치로 사용되는가에 대한 답은 지금도 나는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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