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oyory Aug 28. 2021

아이슬란드에서 새벽 수영을 했다.

Seyðisfjörður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주인공 월터가 롱보드를 타고 내려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 내리막길의 끝에 있는 작고 조용한 동네의 이름은 ‘세이디스피에르뒤르(Seydhisfjördhur)’였다. 우리가 여행 중에 의도치 않게(?) 가장 오래 머문 마을이기도 했다.     


 도착해서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구글링을 통해 이 마을엔 학교와 작은 수영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여행을 떠났던 동행 중 나랑 유일하게 동갑내기 친구였던 ‘L’과 다음날 이른 아침에 함께 수영장에 가기로 약속했다.

     

 첫날 밤을 무사히 보내고, 새벽에 일어나 하얗게 낀 안개를 헤치며 더듬거리듯 수영장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라 주위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알 수 없는 글자로 적힌 종이가 체육관처럼 보이는 문 앞에 붙어있었다. 숫자가 함께 적혀있던 것으로 봐서는 운영시간을 알리는 문장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하며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입구로 들어가니 목욕탕 냄새가 났다. 아늑한 기운을 풍기는 그 공간은 흡사 박물관처럼 고요하고 매끄러웠다. 매표소처럼 생긴 곳에는 중년의 여성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고, 우리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 할 일을 하고 있었다.      


 “Excuse me” 속삭이듯 말을 뱉었고, 그녀는 뒤를 돌며 인자한 미소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새벽부터 동양인 두 명이 이 낯선 땅에 와서 새벽 수영을 하러 올 거라는 상상을 했을까. 전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했다. 


“우리는 두 명이고, 수영을 하러 왔어.
입장권을 구매하고 싶은데, 얼마야?”


언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바디랭귀지가 있었다.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인 다음에 수영하는 것처럼 양팔을 공중에 휘저었다. 그랬더니 어떤 종이를 보여주면서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는데, 단위는 달랐지만 가격이 적힌 표가 그려져 있었다. 카드를 건네고 결제를 마친 후에 영수증과 함께 돌려 받았다. 그때 그 영수증이 너무 예뻐서 어딘가에 잘 둔다고 두었던 거 같은데, 그날 이후로 행방이 묘연해져 찾을 수가 없다. 내 기억 속에만 저장된 그 날의 영수증.  


 탈의실은 목욕탕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락커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그냥 선반 위에 바구니 몇 개가 무심하게 툭 올려져 있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그곳에 짐을 두고 입장하면 된다는 부드러운 명령처럼 느껴졌다.      


 입구로 들어서는데 노신사 한 분께서 이미 수영을 마치셨는지 샤워를 하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70세는 훌쩍 넘으신 것처럼 보였는데, 훤칠한 키와 곧은 자세로 아주 천천히 몸을 닦고 계셨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그 옆에 나란히 서서 몸에 물을 묻혔다.      


 머리에서부터 뒷목을 따라 등을 지나 허벅지와 종아리 그리고 발바닥까지 물의 줄기가 이어지는 동안 노신사의 생애를 상상했다. 이토록 작은 마을에서 일평생을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하고. 물론 그분이 언제부터 이곳에서 살고 있었는지는 이미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타인의 인생이 어땠는지를 잠시 짐작하는 동안만큼 우리는 여행자로서 조금 더 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L과 함께 수영장에 들어서서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을 마주한 순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가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살피고 이내 작은 함성을 질렀다.     


“우와, 미쳤다 미쳤어. 이게 수영장이라고? 영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이 생겼잖아!”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전구처럼 생긴 게 수영장을 감싸 안은 것처럼 빙 둘러져 있었고,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각자가 감탄할 수 있는 최대치의 감탄사를 다 쓰고나서 물에 들어갔다.

발끝부터 물에 담그는데, 심지어 물이 따듯했다.


 “물이 따듯하잖아!? 여기 수영장이 아니라 목욕탕 아니야!!?”     

아주 커다란 욕조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사람이라고는 L과 나 단 둘뿐이었고, 그 공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했다.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천장에 부딪혀 튕겨 나온 소리는 작은 메아리 같기도 했는데, 그 소리가 꼭 우리가 나누는 대화에 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L은 비교적 마른 체형이었는데, 물살을 아주 부드럽고 유연하게 가르는 모습이 마치 돌고래 같았다. 돌고래는 바다에서도 무리를 지어 헤엄을 친다고 들었는데, L이 헤엄치는 모습은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외로워 보였다. 모든 사람들의 뒷모습이 으레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무엇이었다. L은 수영을 오래 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알고 보니 그는 중학생 때까지 선수로 활약을 했고, 그 이후에 수영을 그만두었다는 것을 그날 이후 듣게 됐다. 꿈을 접어야만 했던 이유와 완벽하게 접히지 않은 그 꿈의 틈에서 L은 여전히 헤엄치고 있었을까.     

 

 누군가의 등을 마주하게 되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그것이 나의 것이든 등을 보인 그 사람의 것이든. 타인의 과거를 함부로 추측하고 해석하는 일은 어리석음에 가까운 일일지도(어리석음에 가까워지는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조심스레 다가가 뒤에서 천천히 껴안고 ‘괜찮아, 괜찮아’라고 자꾸만 말해주고 싶은 것은, 그 등이 꼭 내 등일 것만 같아서. 혼잣말은 스스로에게 전하는 안부 같은 것이듯. 잘하고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스스로에게 주기 위해서이듯.      


 그날 L과 나는 아이슬란드에서 새벽 수영을 했었다. 



작가의 이전글 처음과 마지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