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대훈 Aug 22. 2023

6.10 항쟁, 무난한 대전 정서와 불온한 캠퍼스

천년도시는 어떻게 만드는가. 12

대전 시민, 실존은 역사의 주체



나에게 시장 진출을 의뢰하는 고객 대부분은 대전이 아닌 산업체가 많은 지역이었다. 바이어는 해외 도시에 있는 외국인들이었다. 대전에 살면서도 팔도의 사람들과 세계 여러 나라 시민과 살아온 셈이다. 


하루는 내 고장, 대전을 이끄는 기상이나 정신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라오면서 대전의 선배, 선생님, 어르신들의 반복되고 공통된 가르침은


"모나지 않게 살아라" 

"튀지 마라" 

"겸손해야 한다"였다.


"공부를 열심히 해라"라는 말씀도 있었지만

"개성이 중요하다" 

"가능성 밖으로 도전해라"

"탁월한 존재가 되거라“ 라는 말은 기억에 없다. 


‘품행이 방정하여 타의 모범이 되는 것’이 우러르는 가치였다. 덕분에 평범한 사람이 되었지만, 대전시민으로서, 이렇게 중립적인 태도가 대전의 정서였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1982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당시 캠퍼스는 청소년 시절에 제도 속에서 들었던 말과 다른 용어와 정신이 풍미했다. 겸손이 아닌 저항, 모범이 아닌 불온이었다. 민족. 민주. 자유라는 말을 생경하게 들었다. 그러나 학습을 통해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칠판의 관념어가 아닌 실천을 유발하는 힘을 가진 단어였다. 순응을 거부하고 분명한 주장과 행동으로 고난을 자처한 스승같은 선배들을 만났다. 

 




(610기념식을 마치고. 좌로부터 강대훈, 이완규 전) 한전원자력연료 감사. 김순호 신부님, 김병국 묵원대학교 이사장. 우영제 전) 국민참여운동 대전본부장. 2016년 )



1987년 캠퍼스에 복학했다. 6월 10일,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유성 충남대에서 시작한 시위대는 도청과 대전역으로 진군하면서 1만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날 대전의 여러 대학이 함께 궐기하여 대열에 합류했다. 난생처음 겪는 전쟁터 같은 현장이 도청과 대전역으로 이어지는 도심에서 펼쳐졌다. 그날부터 스무날 동안 학생과 시민 시위대가 경찰과 맞붙어, 한쪽은 돌파하고 한편은 진압하려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때 미친 듯 쏘아대는 맵고 타듯 따가운 최루탄 속에서, 저 밑에서 무엇인가 격렬한 것이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대열 밖에서 응원하고 지지했던 시장 상인, 식당 이모, 넥타이형과 사무실 누나들도 대전의 역사를 쓰고 있었다. 


 

 (2017년 6.10 민주항쟁 기념일, 충남대학교 민주동문회원들과 함께 유성구 충대 교정에서 시작하여 옛, 충남도청까지 1987년, 30년 전의 그 길을 걸었다. 경찰의 보호를 받으면 걷는데 격제지감(隔世之感)이었다. 한국사에서 6.10의 의미는 시민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기점이다)




삶의 기억 60년, 대전 57년을 정리하는 시점에서 6.10 항쟁의 의미는 크다. 시민이 승리했다. 6.10 이전에, 다른 지역은 분연히 일어날 때 대전은 죽은 듯 지냈다며 들었던 힐난에 난처했었고, 변혁의 중심과 멀어져 있었던 지역으로써의 열등감을 털어낼 수 있었다. 



그날부터 

"국토의 중심, 대전과 충청권이 변하면 세상이 바뀐다" 


대전시민도, 나도 역사의 주체라는 것을 자각한 기점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 둔산 신도시와 93 대전엑스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