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바쁘다. 무엇을 위해 그리 바쁜 건지 잘 알면서 바쁘게 사는 사람도 있을 테고 도대체 왜 그렇게 바쁜 건지 알지도 못한 채 굉음을 내며 덮치는 파도에 휩쓸리듯 그저 숨이 가쁘게 바쁜 나날을 견뎌내는 사람도 있을 거다. 사정이 어떻든 다들 정신없이 바쁜 것만은 사실이다. 얇디얇은 종잇장도 벨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놓은 칼날처럼 잔뜩 날이 선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발걸음을 느긋하게 바라봐 줄 여유 같은 건 없다.
영국의 팝아티스트 줄리언 오피(Julian Opie)가 그린 그림 속에서 비 내리는 서울을 걷는 사람들도 모두 바쁘다. 모두 서둘러 집을 나서면서도 멋지게 옷을 차려입고 의상과 어울리는 가방에 신발까지 잘 챙긴 모양새다. 저마다 취향껏 우산을 골라 들고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바쁘다. 내리는 비와 함께 떨어지는 꽃잎에 눈길 한번 건네거나 실수인 척 물웅덩이에 부러 발을 밀어 넣고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웃음을 터뜨릴 만한 여유는 없다. 신경 써서 갖춰 입은 옷과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가 망가질세라 한 손으로는 우산을 받쳐 들고 반대손으로는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댄 채 정신없이 빗길을 걸어가는 게 요즘 사람들의 흔한 모습이다.
Walking In The Rain Seoul 줄리안 오피
쉼표가 들어갈 자리 같은 건 없어 보이는 도시의 풍경이 우리나라에 국한된 건 아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친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하며 종종걸음을 친다. 하지만 바쁘게 걷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안타깝게 느껴지는 건 횡단보도 앞에서 한없이 위축되는 모습 때문이다.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는 말할 것도 없고 엄연히 초록불이 들어와 있는 횡단보도에서조차 우회전을 기다리는 차량을 보고 애써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횡단보도를 내달리는 사람들을 보며 조금은 여유로웠던 캐나다의 횡단보도가 떠올랐다.
'보행자 우선'이라는 원칙이 철저히 지켜지는 캐나다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은 그 앞에 선 자동차를 위해 서두르는 법이 없다. 보행자를 위해 자동차가 멈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에 그들은 횡단보도 앞에 멈춰선 차량을 보고도 뛰지 않는다. 각자 자신의 속도대로 길을 건널 뿐이다.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멈출 생각 없이 쌩하고 지나가는 차량 운전자를 오히려 질책하듯 노려보는 이가 있을 뿐이다.
곰도, 사슴도, 산양도 모두 보행자가 자신의 속도대로 길을 건널 때까지 자동차가 가만히 기다릴 거라는 믿음을 갖고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던 그곳에서처럼 모두가 초록불이 켜진 횡단보도에서, 혹은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자동차가 보행자를 위해 멈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원래의 속도대로 느긋하게 길을 건너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