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앞에서
사춘기
요즘은 사진의 시대다. 어딜 가나 사람들은 카메라부터 들이댄다. 여럿이 모여 밥을 먹을 때면 꼭 누군가가 “잠깐만”을 외친다. 예쁘게 촬영한 밥상은 단톡방에 올라가 모두에게 공유된다. 사진 속 인물들은 언제나 환하게 웃고 있다. 무표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누가 카메라만 들면 다 같이 약속이나 한 듯 미소를 짓는다. 웃는 모습이 좋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셔터를 누르는 짧은 순간 활짝 웃었다가 사라지는 미소를 볼 때마다 늘 궁금했다. 오직 한 장의 사진을 위해 순식간에 가짜로 웃는 게 과연 옳은 건지.
언젠가부터 사진이 싫었다. 원래부터 싫어했던 건 아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카메라 앞에서 제법 신이 나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이 싫어진 건 사춘기 때였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는 사진이 싫었던 게 아니라 세상이 싫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춘기는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변화시키지만, 나의 변화는 조금 더 극적이었다. 대개 사춘기가 조금은 수그러드는 시기인 고등학생이 돼서야 나는 본격적으로 사춘기를 앓았다. 그전의 나는 요즘 유행하는 MBTI로 치자면 ‘파워 E’에 가까운 수다쟁이에 말괄량이였다. 내게 사춘기 호르몬은 인어공주의 목소리를 빼앗은 마녀 우르술라의 물약과 다르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입을 닫았다. 세상의 모든 말이 시시했고, 모든 감정이 하찮았다.
사춘기의 나를 잠 못 들게 한 건 첫사랑도, 반항심도 아닌 책이었다. 순간의 가벼운 감정이 담긴 말이나 사진보다는 좀 더 묵직한 진심이 묻어나는 글이 좋았다. 누군가 카메라를 들이밀면 절대로 웃어주지 않았고 진실과 진리를 꾹꾹 눌러 담은 글과 그런 글이 담긴 책만이 가치 있다고 믿었다.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이 칠판에 적은 내용을 그대로 필기하는 대신 혼자 공상에 빠져 글을 쓰는 날이 많았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교과서 밑에 몰래 끼워서 읽다가 등짝을 맞은 일도 몇 번 있었다.
유럽 여행
대학에 들어갔을 땐 사춘기가 절정에 달했다. 금세 휘발되어버릴 말에 가벼운 진심을 담는 게 너무도 불편했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찰나를 기록하는 한 장의 사진을 위해 가짜 미소를 짓는 건 더더욱 싫었다. 대학 1학년 여름 방학, 예정에도 없는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됐다. 지금이야 누가 보내 준다면 넙죽 절이라도 하겠지만 그때는 갑자기 배낭여행을 떠나라는 아빠의 말이 황당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가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가겠다고 선언하자 아빠는 마지못해 승낙하고도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아빠가 생각해낸 묘안은 그래도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는 거였다.
내 짐은 단출했다. 여권과 작은 노트, 볼펜, 간단한 옷가지 몇 개가 담긴 작은 카키색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한눈에 봐도 언니는 나보다 짐이 훨씬 많았다. 목에는 늘 검은색 카메라가 걸려 있었고, 각종 비상용품에 필름까지 잔뜩 든 가방은 내 것보다 훨씬 컸다. 이제 스마트폰이나 DSLR 한 대만 있으면 원하는 만큼, 거의 무한정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지만, 그때는 딱 내 손에 있는 필름만큼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언니는 자주 필름을 갈아 끼우며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거리를 걷다 예쁜 곳이 나오면 언니는 나를 불러 세웠다. 마뜩잖은 얼굴로 뚱하게 서 있는 나를 보며 언니는 자꾸 웃으라고 했다. 다음 차례는 언니였다. 언니가 내 사진을 찍고 나면 나도 언니 사진을 찍어줬다. 사진을 찍는 데 별 관심이 없었던 내가 찍은 사진은 항상 언니가 정성껏 찍어준 사진보다 별로였다. 고즈넉한 유럽의 성당을 즐기는 방식도 정반대였다. 언니는 열심히 셔터를 누르는 쪽이었고, 나는 구석 자리에 가만히 앉아 글을 적는 쪽이었다. 그때는 단 한 번 셔터를 눌러 풍경을 담는 것보다는 종이에 꾹꾹 순간의 감상을 남기는 내 방식이 옳다고 믿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사진을 대하는 마음이 많이 달라졌다. 내가 사진에 담긴 순간의 감상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남편은 기록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아이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순간의 감정에 몰입할 뿐 글로든 사진으로든 아이의 성장을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웬만해서는 카메라를 켜지 않는 남편 탓에 어쩔 수 없이 내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아이의 손짓 하나, 행동 하나에 반해 나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을 찍게 됐다. 지난 순간들을 기록한 사진을 보면,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잊히고 말았을 순간의 감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사진에 담긴 아이들은 대개 활짝 웃고 있다. 아이들이 항상 활짝 웃었던 건 아닐 테다. 웃는 모습이 예뻐서 사진을 찍은 건지, 엄마가 사진을 찍는 걸 알고 아이가 웃어준 건지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사진 속 인물이 웃고 있으면 그때의 기억이 왠지 더 환해지는 것 같아서 좋다.
영정 사진
지난 8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세워진 영정 사진은 딱 아흔다섯의 모습이었다.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 선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사진을 보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마지막 사진인데, 좀 더 환하게 웃는 사진을 올리는 게 좋지 않나요?” 핀잔을 듣고, “그전에 미리 준비했었던 영정 사진은 너무 젊은 모습이라 어색하잖아”라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할머니는 한참 전에, 지금과는 너무 달라서 영정 사진으로 쓸 수도 없을 만큼 젊었던 시절에 영정 사진을 준비해뒀었나 보다. 20년쯤 전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할머니도 단정한 한복을 갖춰 입고 미리 영정 사진을 찍어뒀나 짐작만 할 뿐이다. 한 차례 위암 수술을 하긴 했지만 아흔 가까이 제법 건강했던 할머니는 마지막 몇 년 동안 노환으로 꽤 힘든 시간을 보냈다. 영정 사진에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 정직하게 담겨 있어 슬펐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 정직해야 한다는 의견도, 너무 정직해서 별로라는 의견도 모두 일리가 있었다. 딱히 무언가가 옳고 그를 건 없었다.
사진 속에서 할머니는 웃지도 울지도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진 속 할머니가 웃고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살아계실 적, 가끔 외가를 찾아가면 할머니는 항상 “현정이, 왔니?”라고 반기며 이름을 불러주었다.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면 이상하게 더 환대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영정 사진 속 할머니는 살이 쏙 빠진 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외가에 들어서는 나를 반길 때와는 조금 다른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기억할 할머니의 마지막 얼굴이 담긴 영정 사진을 보며 낯선 유럽 거리에서 자꾸 카메라를 들이대며 웃으라고 했던 언니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는 순간, 그 사진 속 장면은 이미 과거가 돼버린다. 카메라 앞에서 짓는 미소가 꼭 진심은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사진을 통해 지난 시간을 조금 더 행복하게 기억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