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몰입을 부른 그 책, <재즈>
“자유로운 검둥이가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자유로운 인간이기를 원해요.”
“여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다. 남자를 죽음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곧장 죽음으로 밀어넣을 수도 있다.”
“난 인생이 이보다는 더 대단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뭔가 더 대단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 20세기 초 할렘에서 살았던 흑인들의 삶을 그린 <재즈>에 나오는 문장
나는 밑줄을 그어가며 책을 읽는 편은 아니다. 혹은, “아니었다”라고 해야 할까. 언제나 새것 같은 책을 읽고 싶다거나, 기껏 새로 산 책이 서서히 헌 책이 되는 게 마음 아프다거나, 언젠가 다시 읽을 때 옛 감상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내가 오랫동안 밑줄 없이 책을 읽은 건 그저 다음에 나올 말이 궁금해서였다. 밑줄 그을 시간에 한 문장이라도 더 읽고 싶었던 것뿐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도 예외는 아니었다. 문장보다 좀 더 큰 이야기에 언제나 먼저 눈이 갔다. 좋은 문장이 넘쳐나는 글을 읽을 때도, 잠깐 멈춰 생각하기보다 쫓기듯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기 바빴다.
줄 하나 그을 틈도 없이 막무가내로 읽어대는 버릇이 생긴 건 책이 너무도 고팠던 시절을 지나며 독서와 사랑에 빠진 탓일 거다. <재즈>는 나의 독서 습관에 ‘밑줄 긋기’ 과정을 추가해준 고마운 책이다. 좋은 문장 틈바구니에서 더 번쩍이는 문장들이 또 눈에 들어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밑줄을 긋고 더 기억해두고 싶은 말에는 밑줄 스티커까지 붙이다 보니 책이 너덜너덜해질 지경이었다.
<재즈>의 줄거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10대 소녀와 사랑에 빠진 유부남이 자신을 버린 소녀를 죽인 후
그의 아내가 뒤늦게 불륜의 흔적을 뒤쫓는 이야기다.
중년의 남자 조는 10대 소녀 도카스와 불륜을 저지르지만 도카스가 자신을 떠나자 참지 못하고 총으로 쏴버린다. 그들의 불륜을 뒤늦게 알게 된 조의 아내 바이올렛은 도카스의 장례식장에 난입해 난동을 부린다.
분명 이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치정 남녀의 비극적인 결말’ 같은 자극적이고 상투적인 문구로 이 이야기를 압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인물과 그들의 얽히고설킨 삶이 책 속에 담겨 있다.
<재즈>는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이다. 노벨문학상은 특정한 작품에 수여되는 상이 아니라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인 만큼, <재즈> 때문에 상을 받은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1992년에 <재즈>를 발표하고 1993년에 상을 받았으니 영향이 없다고 볼 수도 없을 것 같다.
토니 모리슨에게 늘 따라붙는 수식어는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라는 것이다.
<재즈>에는 흑인 여성이라는 작가의 정체성이 잘 배어 있다. 작가 본인이 직접 흑인의 삶을 온몸으로 겪어냈기에 그들의 인생과 문화를 그토록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어찌 보면 터무니없게 들릴 수도 있는 여성들의 연대를 그토록 섬세하게 그려낸 것 또한 여성의 심리를 꿰뚫고 있었던 탓이라고 짐작한다.
사실, <재즈>는 그리 쉬운 책은 아니다. 무심결에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가는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일인칭 화자 ‘나’가 예고 없이 달라지는 탓에 이번에는 누가 ‘나’인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어야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서술 방식 탓에 <재즈>에 빠져들기 어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러 연주자가 즉흥적으로 선율을 주고받으며 연주를 주도했다가 뒤로 슬그머니 빠지기도 하는 게 재즈 연주의 묘미 아니겠는가!
<재즈>는 말 그대로 한 곡의 재즈였다.
한 마디로, 여러 화자가 ‘나’가 되어 때로는 직접 연주하다가 때로는 청중이 되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
자연스럽게, 정해진 곡조도 없이, ‘나’와 ‘너’가 뒤바뀌는 재즈 같은 이야기였다.
<재즈>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복잡하게 뒤엉킨 삶의 가닥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다양한 서사가 탄생한다. <재즈>를 읽다 보면, 일반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도저히 가까워질 수 없을 것만 같은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웃으며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살인자의 아내인 바이올렛과 피해자의 이모 앨리스가 바로 그들이다.
바이올렛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앨리스도. 곧 두 사람은 배를 움켜쥐고 온몸을 흔들며 웃었다. (p. 179)
바이올렛과 앨리스는 <재즈>라는 긴 이야기의 시발점이 된 살인 사건에서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 그런 두 사람이 어떻게 한 공간에서 웃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두 사람의 묘한 연대가 낯설었지만, 어쩌면 그들의 아슬아슬하지만 한없이 깊은 관계가 현실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살인 사건. 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명백하다. 바이올렛은 가해자의 가족이고 앨리스는 피해자의 유가족이다.
그러나 관점을 비틀면 순식간에 공수가 전환된다. 조와 도카스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서로를 탐닉했다. 아내를, 이웃을 배신한 불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조와 도카스는 가해자가 되고 앨리스는 가해자의 가족이 된다. 이 관계에서 바이올렛은 누군가의 가족, 혹은 유가족이 아니라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피해 당사자가 돼버린다.
가해자의 부인인 동시에 피해자인 바이올렛.
피해자의 유가족인 동시에 가해자의 이모인 앨리스.
이 둘은 우중충하고 모호한 회색 지대에 서 있다. 자신의 의지로 맡게 된 역할이 아닌 어쩌다 보니 떠맡게 된 복잡한 역할이 뒤섞인 애매한 지대에 놓여 있다.
완벽한 가해자도, 완벽한 피해자도 아닌 그 복잡한 속내를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을 때, 이만큼 완벽한 짝이 어디 있을까 싶어 너무나도 기발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웃음은 완벽한 화해도, 완전한 용서도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는 두 여자의 짧은 공명이었을 뿐이다. 마치 재즈 연주에서 여러 악기가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내듯 말이다.
딱 떨어지는 이름표를 붙이기 어려운 관계는 이뿐만이 아니다.
- 조가 쏜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쏜 범인이 누구인지 끝끝내 함구하는 도카스
- 흑인의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난 후 흑인 하녀 트루벨에게 아이를 맡긴 백인 여자 베라 루이즈
- 아름다운 피부를 가진 혼혈아 골든 그레이를 사랑으로 키우는 트루벨
- 흑인 아버지를 찾아 숲을 헤매는 골든 그레이
여러 등장인물의 굴곡진 삶과 간단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관계가 복잡한 실타래처럼 끝없이 엉켜 있다.
어쩌면, 토니 모리슨은 <재즈>를 통해 ‘삶은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 그리 간단하지 않은 복잡한 선율’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