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세상에는 순식간에 상대의 적의를 불러내는 말들이 있다. 조롱하고 비웃는 말, 교묘하게 깎아내리는 말, 상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말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런 말들은 피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적의를 부르는 게 분명한 단어나 표현을 조심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언어의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누군가를 모욕하는 순간이 찾아올 수도 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하는 법이다.
언어 감수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언론에서 그런 실수를 저지르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런데 며칠 전 이재명 대통령의 캐나다 방문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보고 당혹감이 들었다.
기사 제목은 ‘캐나다 인디언 환영 받은 이재명 대통령’이었다.
잠깐, 정말 괜찮은 표현일까?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 인디언~’하며 열 꼬마까지 헤아리는 동요를 부르며 자란 사람들은 “왜요? 뭐가 문제죠?”라며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대통령 맞은편에 선 남자는 화려한 깃털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영락없는 인디언의 모습 아닌가!
우리나라에서 인디언은 과자 봉지에 그려진, 동요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런 귀여운 이미지에 가깝다. 그러나 캐나다에서는 그 무게가 다르다. 우리에게는 친숙한 단어가 누군가의 오랜 아픔을 건드리는 말일 수도 있다는 사실,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디언’이라는 단어가 무엇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걸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그 말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캐나다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는 건 한마디로 모욕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북미 대륙 원주민들이 인디언(Indian)이라고 불리게 된 건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인도로 착각한 탓이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그 후다.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동안, 원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정체성을 잃고, 고통스러운 역사를 견뎌야 했다. ‘인디언’이라는 단어에 그들이 겪은 고통의 무게가 고스란히 얹힌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조센징’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자.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 자체는 중립적이다. 그러나 이 단어를 향한 감정은 한없이 무겁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 함께 딸려온 멸시와 상처의 기억이 그 안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단어 자체만 놓고 본다면 그 어떤 멸시나 비하도 없는 ‘인디언’이라는 단어 역시 역사의 무게에 짓눌려 원주민들의 존엄을 짓밟는 단어로 변질된 것이다.
인디언으로 불리던 시절, 캐나다 원주민들은 상상 이상으로 참혹한 시간을 견뎠다. 옛 캐나다 정부는 원주민들로부터 삶의 터전을 빼앗는 데서 만족하지 않았다. 원주민 아동들을 캐나다 문화에 완전히 동화시킬 목적으로 캐나다 곳곳에 기숙학교를 세운 다음 부모 품에서 억지로 떼어내 기숙학교에 밀어 넣었다.
캐나다에는 그 시절 원주민들이 겪었던 혹독한 삶을 폭로하는 소설이 제법 있다. 어느 소설 속에 등장하는 원주민 소녀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혹독한 벌을 받았다. 온도계가 영하 30도 밑으로 내려가는 엄동설한에 운동장 한가운데 서 있는 철봉에 혀를 대고 있으라는 벌을 내린 사람은 학교 운영을 책임졌던 수녀였다.
수녀라는 말에 당혹감이 드는가? 다른 뜻이 있는지 고민되는가?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수녀가 맞다. 안타깝게도 가톨릭교회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서 원주민 아동이 학대당하고 목숨을 잃은 것은 허구가 아니었다. 실제로 여러 기숙학교에서 수많은 원주민 아동이 폭력과 학대에 스러졌다.
2022년 캐나다를 방문한 교황은 가톨릭교회가 운영했던 기숙학교에서 벌어진 원주민 아동 학살을 사죄하며 고개를 숙였다.
“겸허히 용서를 구합니다.”
누가 어떤 말로 사과해도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로 바뀌지는 않지만, 진심이 담긴 사과만큼 위로가 되는 것도 없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 보건 서비스(Indian Health Service)’, ‘인디언 업무국(Bureau of Indian Affairs)’ 같은 이름을 여전히 고집한다. 그러나 캐나다에서는 ‘인디언’이라는 단어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물론, 인도인을 가리키는 의미로는 널리 사용된다.)
인디언이 아니라면, 도대체 ‘백인보다 앞서 그 땅에 살았던 그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유엔의 권고는 ‘토착민(indigenous peoples)’이다.
그러나, 캐나다가 사랑하는 정답은 따로 있다.
바로, ‘퍼스트 네이션스(First Nations)’.
누구보다 먼저 그 땅에 살았던 ‘최초의 민족 공동체’라는 의미가 담긴 표현이다. (캐나다의 원주민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그중 첫 번째가 퍼스트 네이션스, 나머지 둘이 이누이트와 메티스다. 캐나다에서도 이 셋을 모두 아우를 때는 토착민을 뜻하는 'indigenous peoples'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캐나다 정부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공식적인 표현을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 교육 커리큘럼 수정, 보건 시스템 개선, 법제도 강화, 문화 복원에 이르기까지 원주민 공동체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애쓴다.
나 역시 캐나다에 사는 동안 퍼스트 네이션스라는 말을 정말 자주 들었다. 캐나다의 공교육 커리큘럼에서 퍼스트 네이션스는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초등학생이 된 순간부터 캐나다 아이들은 원래 그 땅의 주인이었던 퍼스트 네이션스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운다.
캐나다 원주민들의 삶은 여전히 불편하다. 원주민들이 모여 사는 보호구역은 아직도 치안과 위생이 캐나다 평균을 훨씬 밑돈다. 그러나 차별과 반목의 역사를 감추지 않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방법을 찾는 모습을 보면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불빛이 보이는 듯하다.
우리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제삼자일 뿐이다. 하지만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가 먼저 그들을 존중하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 그 또한 작은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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