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늦은 저녁잠이 들어 밤 11시쯤 깨어 한 번 시간을 확인했을 뿐 오늘 아침까지 푹 잠을 잤다. 타이레놀 2알을 먹고 자서 그런지 새벽에 뒤척이지 않고 코 고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났다.
이층 침대에 참 오래 누워있었다고 생각하며 씻으러 화장실로 향하는데 어제 바나나와 과자를 주신 아주머니가 “이제 괜찮니?”하고 물어봐주셨다. 나는 이제 100% 충전되었다며 어제 정말 감사했다며 다시 한번 인사를 드렸다.
짐을 다 챙긴 후 7시 반쯤 길을 나섰다. 문을 나서면서도 심란하다. Pobena에서 다음 도착지까지 얼마나 갈 것인지 빌바오에서부터 고민이 많았다. 카미노 앱을 보니 Pobena와 Laredo 사이에 있는 Castro Urdiales가 원래대로라면 오늘의 숙소가 될 알베르게가 있는 곳인데 시즌이 아니라서 닫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많이 걸을 것인지 아니면 두 갈래로 나눠지는 Santullan에서 하룻밤 잘 것인지 길을 걸으면서도 결정을 못했다. 그리고 산사태로 Pobena의 원래 순례길이 막혀 다른 길을 따라 걸어야 했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종종 산 밑을 관통하는 긴 터널을 지난다.
임시로 난 길을 걷다 보니 나보다 조금 먼저 출발한 독일인 그룹이 벽을 보며 표지판을 보며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거기에 레나도 보인다. 표지판에는 왼쪽으로 가면 12.8km, 오른쪽으로 면 7km라고 적혀 있었는데 왼쪽은 Santullan을 지나고 오른쪽은 Castro Urdiales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럼 일단 Santullan을 거쳐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해결이 됐다. 나는 Castro 마을이 있는 오른쪽으로 걷기 시작했고 언덕길에서 외투를 벗기 위해 잠시 멈춰 앉으니 다른 사람들도 내 뒤로 따라오고 있었다.
해안길을 하염없이 걷는다. 보이는 건 바다뿐이어도 좋다.
이 길은 해안길을 따라 뻗어있는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었다. 제법 큰 휴양지인 Castro Urdiales에 다 다르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 푹 잔 덕분인지 몸에 많이 힘들지 않아 쉬지 않고 계속 걸었다. 순례길에서 조금 벗어나 마트를 찾는다.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Lidl에 들려 점심용 곡물빵과 오트밀우유, 바나나, 모둠 샐러드를 사서 벤치에 앉아 먹었다. 오르막길에 마을이 있어 샌드위치를 먹으며 아래에 보이는 골목을 곳곳이 눈으로 살핀다.
1시간쯤 걸었을까. 도로와 도로 사이의 작은 마을이 있다. Cerdigo 마을인 것을 벽에 크게 써붙여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다시 한번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Cerdigo 마을
아번에는 Islares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사립 알베르게가 있다고 했는데 후기가 좋지 않아 그냥 지나가기로 했던 곳이다. 아침부터 6시간은 걸은 셈이어서 마을 끝 무렵에 있는 카페에 들러 카페콘라체를 시키고 오랜만에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다. 웬일로 조카 대신 언니가 바로 받아 잠깐 통화를 했다. 언니는 내가 길거리에서 어떻게 살아남고 있는지 뭘 먹고 다니는지 신발을 괜찮은지 등등을 물어봤다. 개조카 구름이와 같이 산책을 나온 모양이다.
카페에 들르면 제일 먼저 Wifi를 찾는다. 스페인에서 와이파이는 "위피" 라고 발음한다.
짧은 통화를 마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오늘은 하루 종일 어디까지 걸을지 그것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계속 고민하며 걸으면서도 3시간 더 걷어가면 나오는 Liendo까지 걸을지, 5시간 더 걸어 수녀원 알베그레가 있는 Laredo까지 갈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Islares 해변
그렇게 하염없는 걷는 중 오른쪽으로 보이는 해변에 사람들이 모래사장에서 놀고 있는 게 보였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아래로 내려가서 저기 보이는 모래를 밟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가는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충 길을 만들어 내려가기에 괜찮아 보여 일단 물이 보이는 아래까지 내려갔다.
투명한 바다색과 빨간 옷을 맞춰입은 가족들
내려가 신발을 벗고 어떻게 물을 건널 것인지 잠깐 고민이 했다가 ‘언제 내가 스페인 해변에 발을 담가 보겠는가’라는 굉장한 자기 합리화에 냄새나는 등산화를 벗고 물에 발을 내디뎠다. 굉장히 더운 내 얼굴과는 달리 물이 굉장히 차가웠다. 그리고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신이 났다.
첫 발을 물속으로 딛었는데, 바닥이 우리나라 낙지 잡는 갯벌처럼 깊었다. 아마 내가 걸었던 곳이 썰물 때는 바닷물에 잠겼다가 물이 빠지는 곳이어서 그런지 발이 15cm는 쑥 들어가는 모래 갯벌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 발목 위보다 더 깊게 발이 들어가서 어기장어기장 건너편으로 건너갔다.
의심할 바 없는 팔자걸음이다.
그렇게 5분쯤 걸어갔을 때, 멀리서 봤을 때는 충분히 건널 수 있을 줄 알았던 해변이 막상 눈앞에서 보니 내 키를 훌쩍 뛰어넘은 깊이였다. 그렇게 길 건너편으로 갈 수있을 거라는 기대를 접고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 도로 위로 올라갔다.
짧은 그 시간이 왜 이렇게 재밌었는지. 발가락 사이의 모래를 탈탈 터는데 기분이 그냥 참 좋았다. 왜 이렇게 신났지 생각해 보니,모래사장에서 맨 발로 놀아본 게 참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양말과 신발을 다시 신고 이제 순례자로 돌아가 길을 다시 걸었다.
4시쯤 넘어 Liendo에 도착하였는데 결국 Laredo 수녀원에서 하룻밤 지내기로 결정하고 앞으로 계속 걸었다.더 걷기로 한 이유는 지난번 수도원에 머물 때 알베르게에서 순례자 프로그램을 참여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어제 자기 전 앱에서 Laredo의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에도 순례자를 위한 체험 프로그램이 있다고 읽었기 때문이다.
Laredo까지 5km
그렇게 오후 5시 50분쯤 수녀원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마치고 프로그램을 물어보니 이곳도 오늘은 없다고 하였다. '그 먼 길을 걸어왔는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크게 들었다. 살면서 뭐든 확실하게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럴 수 있다'라고 여기면 그렇게 실망할 일도 없다.
이전과 달리 수녀원 건물은 살펴보지 못하고 별채에 있는 숙소에 들어오니 여성 두 분이 먼저 와 계셨는데,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또 다른 네덜란드 사람들이다. 어제오늘 많이 걸은 탓일 것이다. 아마Irun에서 나보다 하루 이틀 전에 출발한 그룹을 만난 것 같았다. 이 두 분은 내가 어디에서 걸어왔는지 궁금해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그런 것이리라. 나는 오늘 많이 걸어 도착했으며 이곳 수녀원의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없다고 들어 좀 아쉽다고도 했다. 이 중 왼쪽 침대에 누워계신 분은 나 보도 그럼 거의 60Km를 걸어왔냐고 믿기지 않는 듯이 물어보셨다. 그래서 난 포베나에서 레나도까지 여러 길이 있어 중간중간 대안길을 만나 그리로 걸어왔고 10시간 정도를 걸은 거 보니 한 48km 정도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고속도로를 지나왔나 보네’하며 조금 못마땅하듯이 대꾸하신다. 다른 길이 있었나 보다.
지난번 빌바오에서로빈을 만났을 때 그랬다. 본인이 길에서 네덜란드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독인일들이 중간중간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고 못마땅하듯이 얘기했단다. 이분을 만났었나 보다. 그렇지만 산티아고 걷는 길에 정해진 답도 옳은 길도 없다. 다 자신만의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일 뿐.
Laredo Trinidad 수녀원, 정면은 예배당이고 오른쪽이 알베르게이다.
욕실에 욕조가 있다. 뜨거운 물을 받아 목욕을 하고 싶지만 다음 사람을 위해서 간단히 샤워만 했다. 씻은 후 부엌에서 간단하게 남은 빵과 샐러드를 먹은 후 방으로 돌아오니 그 사이 2명의 레이디가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독일에서 오신 이분들이 오늘 Castro Urdiales에서 오셨다는 게 아닌가. 카미노 앱에서 알베르게가 닫았다고 나온 그곳 말이다. 그래서 난 거기 알베르게가 닫아서 오늘 그냥 지나쳐왔다고 했더니 본인들도 그럴 줄 알았는데 그냥 가서 똑똑 문을 두드리니 사람이 나왔다고 하셨다. 두 분은 휴대폰에 앱이 있긴 해도 앱보다는 산티아고 북쪽길 책을 보면서 다니신다고 했다. 역시나 확실한 건 없는 모양이다.
나도 다음은 시도해 보리라 하며 2층의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막상 도착할 때는 피곤함이 심하지 않았는데 밤에 몸의 피로가 한꺼번에 찾아왔다. 내일은 27km쯤 걸어 100명이 머물 수 있는 큰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인 Guemes에서 머물 예정이다. 북쪽길을 걸으면 꼭 들려야 한다는 곳이다. 후기가 별 5개인 곳이라서 오늘 실망한 마음이 내일 채워졌으면 하길 소망해 본다.
침낭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에도 침대가 무너질 듯이 큰 소리로 삐그덕거려 몸을 뒤척이기가 어려운 밤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