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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w Sep 01. 2023

두 번째 산티아고, 열째 날

Laredo – Guemes 27.36km

 2023.4.23  


지난밤엔 조금의 미동에도 침대소리가 삐그덕 삐그덕 너무 요란하여 아래층의 순례자가 깰까 봐 움직이질 못했다. 얼른 아침이 왔으면 하는 밤이 지나갔다.


한 이삼일 화창하더니 창문 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저녁에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둔 아침을 먹고 오니 방에는 내 짐만 남아 있었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수녀원 알베르게였다. 이렇게 잠만 자다 가는 것이 아쉬웠지만 어쩌겠는가.


가장 마지막으로 나와 마을 중심가를 걷는데 비가 더욱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사거리에서 앱에서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라가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비가 오니 휴대폰을 내내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주머니에서 넣어둔 데다가 오늘처럼 비가 계속 오는 날이면 거리에 달팽가 너무 많아 혹여나 밟진 않을지 땅만 보며 걸어서 길을 잃은 것 같기도 하다. 

달팽이가 많아서 비오는 날은 발 밑을 조심해야한다.

시내는 순례길 화살표가 잘 보이지 않아 길을 잃기 쉽다. 사거리 한쪽으로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였고 두 갈래에서 반대로 갔음을 알았다. 그래도 괜찮다. 잠시 잃어버려도 길은 찾을 수 있다.


30분쯤 걸었을 까, 여전히 Laredo 변두리였는데 비가 더 거세져 아무래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바로 앞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나의 할 줄 몇 안 되는 스페인어, '카페콘라체' 하고 라테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꺼냈다. 와이파이는 없는 동네 카페인데 신사 같은 주인아저씨가 만들어주신 커피가 어찌나 맛있던지. 작은 커피잔을 빨리 비우고, 같이 주신 쿠키도 한 입에 먹었다. 그리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커피잔을 받자마자 한 모금 마신 카페콘라체 그리고 쿠키

글을 쓰면 복잡한 마음이 사라지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리고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이지만 잊을 뻔한 일도 글을 쓰면서 다시 그 느낌이 상기되어 떠오른다. 밖에 비는 계속 내리고, 그렇게 가만히 앉아 미동 없이 키보드만 두드리다 보니 2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일기를 쓰다 보니 느낀 건 열흘 동안 한 일이라곤 일어나 걷고 카페를 들리고 또 걷고 숙소에 도착해 손빨래를 하는 똑같은 일상인데 매일 써 내려가는 이야기는 매번 다르다.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지만 그 안의 이야기는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무엇을 봤는지에 따라 다 다른 것이다.


카페 손님들이 가만히 앉아 노트북을 하는 내가 신기하셨나 보다. 종종 구부러진 몸을 필 때 카페 안의 어르신들과 눈이 마주쳤다. 비 오는 일요일 오전의 카페는 늦으막이 아침 커피를 마시러 나오신 어르신들이 전부였다. 너무 오래 머무른 것 같아 짐을 다시 싸고 카페를 나섰다.

Colindres 마을

오늘 가는 길은 Colindres 마을 끄트머리에서 보트를 타고 다시 해변 쪽으로 걸어가거나 보트를 타지 않고 남쪽으로 내려가 20km를 더 걸어 마을 곳곳을 지나는 길을 걸을 수 있는 두 가지 선택길이 있는 곳이다. Laredo를 벗어나 걷다가 빨간색으로 마을 이름 Colindres을 세워 놓은 곳을 지나갔다.

오래된 고성같은 교회와 그 건너편의 레몬나무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는 조용한 일요일 오후가 계속되었다. 보트 선착장까지 걷는 중 또 다른 마을을 지나가는데 매우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교회 앞에 또한 매우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큰 레몬 나무가 신기하여 고개를 위로한 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었다. 레몬나무가 땅에서 이렇게 크게 자란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고 레몬이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습이 다소 신선한 충격이었나 보다. 한참을 하늘을 보고 서있으니 지나가시던 할아버지께서 그런 나를 지켜보고 계셨나 보다.

레몬 세개와 손수 가꾸신 아기자기한 집 앞의 할아버지

이윽고 손짓으로 나를 부르시더니 우리나라 배 크기만 한 레몬 3개를 손에 쥐어 주셨다. 할아버지 댁의 정원에는 백설공주와 난쟁이들이 살고 있을 것처럼 아기자기한 장난감과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다홍색 스웨터를 입고 계신 할아버지와 잘 어울리는 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숙여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리고 떠나기 전 할아버지 사진도 찍었다.


늦게 출발한 만큼 숙소에 늦게 도착하는 법이다. 또다시 마을에서 갈림길을 잘못 선택해 길을 잃고 말았다. 이번에는 끝없이 펼쳐있는 들꽃과 카라 꽃 핑계를 댄다. 한국에서는 꽃집에 들어가서나 볼 수 있는 카라 꽃이 여긴 논두렁에, 하수구에 아무렇지 않게 피어있다. 잘못 들어간 길은 산속까지 이어져 있어 막힌 길을 보고서야 다시 돌아 나왔다.

하얗고 노랗고 분홍한 들꽃과 하수구 옆에 핀 카라 꽃

오늘 숙소는 북쪽 길에서 유명한 알베르게이다. 일단 수용인원이 100명이다. 북쪽길을 걷는 순례자 대부분이 이곳에서 하룻밤 자고 가는 것 같다. 약 7시가 다 되어 숙소에 도착하니, 주인 할아버지가 문 앞에서 맞아주셨다. 그리고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짐을 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알베르게에서 봉사하는 봉사자분들이 다섯 분은 넘게 계시는 것 같았다.


저녁 식사 전, 7시 반에 다 같이 모이는 공동체 시간이 있다는 안내를 받고 서둘러 씻은 후 모두가 모여 있는 자리로 모였다. 올해 86세이신 주인 할아버지는 이 시간을 통해 어떻게 이 알베르게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서 이 알베르게를 운영하며 약 25년 동안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스페인어로 말씀하셔서 미국에서 온 순례자가 통역을 해 주었는데 중간중간 다른 사람들도 거드는 상황이 유쾌하였다.

Guemes의 사립 알베르게를 운영하시는 할아버지

머리를 말릴 시간 없이 앉아 주인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중에 뒤에서 "아이고, 등이 다 젖네, 이 수건 써요" 하고 누군가 한국말과 함께 손이 쑤욱 앞으로 나왔다. 열흘 만에 한국인 순례자를 만난 것이다. 내게 살갑게 말을 건네주신 어머님은 지난주 수요일에 도착해서 남편분의 주도 하에 중간중간 차도 타고 걷고 하며 순례길을 다니고 계신다고 하셨다. 북쪽길에서는 처음 한국인을 만나 말이 많아졌다. 내가 발목이 빨갛게 부르튼 것을 보시고 약을 챙겨주신다고도 하셨다. 이 마음을 나도 알기에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며 받았다. 나도 프랑스길을 걸을 때 아픈 사람들을 보면 내가 갖고 온 비상약을 나누곤 했었다. 다 같이 한 곳을 향해 걷는다는 동지애 같은 것이리라.


주인 할아버지의 말씀 이후 이어지는 저녁 식사 시간에도 두 분 옆에 앉아 그동안의 산티아고 길에서 걸어온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거의 7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저녁을 먹는다는 경험은 참 신기하다. 그것도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한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로 자기 이야기를 나눈다. 거기다 봉사자분들이 요리해 주신 저녁은 정말 맛있었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채소 수프가 비 오는 추운 저녁에 딱 알맞았다. 수프를 두 그릇이나 먹고 그다음 나온 파스타도 소스가 정말 맛있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먹는 맛인데, 초등학생처럼 정말 정말 맛있다는 말이 계속 나오는 그런 맛이다. 그렇게 모처럼 따뜻한 저녁을 마치고 신기한 체험을 한 기분으로 침대로 돌아왔다.

흥미진진한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순례자들

내일은 큰 도시인 산탄데르를 간다. 유럽 전역에 있는 Santandar 은행의 그 산탄데르이다. 중간에 보트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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